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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기록

레너드 장의 식료품점 / Leonard Chang - The Fruit ‘N Food: 아시아계 미국 이민자의 이야기, 인종문제 관련 문학작품

by 나의달님 2021. 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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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체첨삭 필요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글) / 3년 정도 전에 작성된 글입니다. 
** 작품에 대한 언급을 서론의 처음에서 할 것

 

이 포스팅은 두번에 나누어 업로드될 예정입니다. 소중한 창작물을 함부로 도용하지 말아주세요. 

 

신화 속의 이민자:
『식료품점』의 세대별 한국계 미국이민 양상

 



2017년 통계에 따르면 아시아계 미국인은 뉴욕(New York)에 사는 여러 인종 집단 중에서도 27%라는 가장 높은 빈곤율(poverty rate)을 구성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많은 사람들이 아시아계 미국인에 대해 생각할 때 그들이 주로 고학력자이며 재정적인 상황도 대다수의 미국인보다 더 좋을 것이란 고정관념을 재고하게 만드는 그야말로 충격적인 연구 결과다. 미국통계국(U.S. Census Bureau)에서 말한 아시아계 이민자의 수가 2065년까지 지속적으로 증가해 결국 미국에서 가장 큰 이민자 그룹을 구성하게 될 것이란 전망을 고려할 때, 매일 같이 거리로 나서 일을 갈구하는 아시아계 미국인에 대한 기사는 모델 마이너리티(Model Minority; 모범 소수민족) ‘신화’가 얼마나 많은 사회 문제들을 은폐하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Next Shark).

모델 마이너리티 이미지는 2차 대전 후 냉전 시대에 아시아계 이민자들이 미국에서 타 인종집단에 비해 빠른 경제적 성공을 이룩한 것에서 비롯됐다(이정덕 126-27). 이 개념은 이민자들도 열심히 노력한다면 미국에서도 쉽게 제 2의 집을 찾을 수 있을 거란 낙관적 비전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아메리칸 드림(American Dream)과 궤를 같이한다. 이 이미지는 일견 미국 내 인종주의가 극복 가능한 대상인 것처럼 설파하고 있지만, 기실 “흑인들과의 대조 속에서 아시아인을 미화함으로써 흑인들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백인지배문화의 수사법으로 기능”하게 되며 아시아계가 가령 흑인이나 히스패닉보다 보다 ‘모범적’으로 잘 생활한다는 의미로 인종 분리 및 차별을 “자극”한다(임진희 165). 달리 말해 백인 주류집단이 만든 이 이데올로기는 아시아계 이민자들의 성공을 부각시키게 되면서 흑인의 사회 부적응 사례는 모두 흑인의 원인으로 전가시키려는 의도를 내포한다고 볼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모델 마이너리티 신화가 빚어낼 수 있는 또 다른 치명적인 문제는 성공적으로 정착하지 못한 아시아계 미국인의 경우에도 그들의 실패는 제도, 체제적인 모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개인의 문제로 환원되고 치부된다는 점이다.

허구성 논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모두의 마음속에 보편적으로 살아 숨 쉬는―그렇기에 ‘신화’라고도 불리는―이 개념은 백인주류사회가 소수인종을 효과적으로 분리해 지배할 수 있도록, 소수민족 사람들이 불평을 삼키고 인내하도록 ‘순치’한다. 다수가 성공 가도를 달릴 때 개인의 실패가 있다면 그것은 개인의 일탈로 간주되고 개인의 방만함이 지적받는 상황인 바이다. 안정적으로 주류사회에 동화되고자 고군분투하는 소수인종 이민자들이 넘기 힘든 높은 장벽이 분명 존재하고 있지만 이 문제는 좀처럼 쉽게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상황의 보다 근본적인 개선은 요원한 일로만 보인다.

레너드 장(Leonard Chang, 1968-)의 첫 소설『식료품점』(The Fruit‘N Food, 1996)은 미국 사회에 성공적으로 정착하고 동화되기 위해 노력하는 아시아계 이민자들의 모습을 잘 담아낸 작품이다. 그들 모두는 일견 모델 마이너리티 범주에 잘 부합하는 인물들로 그 누구보다 근면하고 성실하게 일한다. 그런데 아메리칸 드림은 눈앞에 아른거리다가도 가까이 다가설라치면 사라져버리는 신기루처럼 자꾸만 그들을 회피한다. 하지만 그 누구도 감히 이 존재를 부인할 수 없어 애만 태운다. 이 글은 이민 1세대에 속하는 이씨(The Rhees) 부부와 2세대에 속하는 토마스(Thomas; 톰)와 준(June; 정미)을 중심으로 모델 마이너리티와 아메리칸 드림 신화 속에서 살아가는 이민자들의 모습을 살펴보고자 하는 시도다. 특히 이민자들이 신화 속에서 거듭 좌절을 맛보면서도 왜 신화의 힘에 ‘결탁’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논의가 이 글의 요체다. 물론 이 인물들은 모두 나름대로의 특수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들을 보편적인 미국 이민자의 초상으로 볼 순 없다. 그러나 적어도 이민 1세대와 2세대가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미국 사회에 적응해나가고 있는지, 아울러 그들이 필연적으로 맞닥뜨리게 되는 인종 간 갈등이 그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어떠한지에 대해 검토해볼 가치는 충분하다고 판단된다.



이전 한국계 미국이민은 한국 근대사의 정치적 상황이 주도해 왔던 것과는 달리 ‘제 3의 이민 물결’이라 불리는 1965년 이후 급증한 이민은 주로 자본주의 논리에 기초한 경제적 성공을 위한 목적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이민 1세대에 속하는 이 씨 부부의 이민 생활 또한 순전히 미국 토양에서 경제적으로 성공해 계층 상승을 이룩하고자 하는 열망이 주를 이룬다. 이런 상황에서 이 씨 부부와 같은 높은 자영업자의 비중은 “경제력이 신분의 지표가 되는 상황과 연관되어 있으며, 역사성의 대체물로서 경제력에 집착하는 소상인적 가치관이 재미한인사회의 특성을 형성”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임진희 153).

이 씨는 한국 대학에서 전기 공학을 전공했지만 미국으로 이민 후 직업을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72). 이처럼 아무리 고학력자이거나 전문직에 종사했던 사람들이라도 미국으로 이민 후엔 경력을 그대로 인정받기 어렵고 또 언어적인 문제 때문에 고국에서 했던 혹은 할 수 있었던 일에 상응하는 일자리를 구하는 데 있어 고충을 겪는다. 그들은 눈앞에 놓인 저임금의 고된 육체노동의 현실을 마주하며 좌절감을 느낀다. 민병갑(Pyong Gap Min)은 이를 지위불일치(Status Inconsistency) 현상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고학력 이민자들은 이 괴리를 해소하기 위해 자영업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인다. 자영업에 종사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이롭다. 첫째, 자영업은 높은 경제적 이동성(economic mobility)을 허용한다. 둘째, 자영업자들은 일반 노동 시장에선 찾지 못할 자율성(autonomy)을 누릴 수 있게 된다(444). 반면 어려움도 항존한다. 한국계 미국 이민자들이 식료품점, 세탁 혹은 패스트푸드 서비스업과 같은 노동집약적 산업에서 성공을 거두는 사례가 많은 이유는 그들이 장시간 노동을 마다하지 않기 때문인데, 비좁은 공간에서 단조롭고 반복적인 일을 하다 보니 많은 한국인 사업가들이 만성피로, 수면 부족 문제를 토로하는 실정이다. 그들은 우울증 위험에도 쉽게 노출된다(441). 또 다른 어려움으로서 한인들은 업무 수행에 있어 낮은 수준의 영어를 구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나머지 느린 동화(assimilation) 속도라는 덫에 걸리게 된다(448).

이 씨 부부 또한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이어지는 그야말로 “가혹한 일과”(rigorous schedule 13)를 매일같이 소화해낸다. 그들은 가게 뒤꼍에 있는 작은 방에서 국수로 대충 끼니를 때우고(44), 좀도둑이 들어 신고하면 매번 허탕만 치는 경찰들로부터 어떤 보호도 기대할 수 없고(17), 사금융인 계(keh 66)를 이용해 외줄 타듯 위태롭게 자금을 조달하고, 보험도 들지 않은 채로(206) “위험한”(risky 58) 사업을 진행한다. 그런데 식료품점 내부와 외부의 시각에는 무시할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외부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이 씨 부부는 사업에 성공한 자들로 항시 풍요로운 음식과 생필품으로 가득 찬 공간에서 손님들을 맞으니 말이다. 그들은 시종 사업 확장(expansion) 계획에 골몰하고 있으니 내부자인 톰이 보기에도 그들은 언제나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 같다(23). 그들이 현재의 고통을 억척스럽게 참아가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이유는 그들에게 “미래지향적 사고”(future-oriented thinking 139)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톰에게는 불가능한 이 사고방식 덕분에 그들에겐 언젠가 딸을 아이비리그(Ivy League)에 보내고 이후 일찍 은퇴해 여생을 즐기거나 롱 아일랜드(Long Island)에 집 한 채를 마련할 수 있을 수도 있을 것이란 희망에 기대어 산다(68).

그런데 빠른 경제적 성공에만 혈안이 되어있다 보니 이들은 종종 큰 그림을 못 보게 되는 경우가 많다. 사업을 시작한 지 어느덧 사 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단골손님인 해리스(Harris)를 제외하면 이 씨 부부는 다른 손님과는 특별한 인간적인 유대도 맺고 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주로 가게를 지키는 이 씨 부인은 한숨을 쉬며 “손님을 올려다보지도 않을 채 돈을 받는”(Mrs. Rhee took the money without looking up 50)가 하면, 좀도둑을 발견하더라도 내심 불편한 상황을 모면하길 원하며 어물쩍거리는 톰에게 “그 누구도 돈 내지 않곤 못 나가게 해!”(You make sure no one go without pay! 52)라고 잘라 말한다. 이것이 바로 식료품점 내부에 만연하는 절대규칙(the absolute rule)이다. 돈이 유입되기만 한다면 소비자가 누가되든 개의치 않는 모습을 보일 때 그들은 욕심 많은 수전노의 모습을 닮아있다. 그래도 그들은 이렇게라도 살다 보면 훗날 분명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이고 자족할 수 있는 날이 오리라 굳게 믿는다. 새로운 터전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일인 만큼 그것이 결실을 맺으려면 인내심이 필요한 법이다.

그런데 현실은 생각만큼 녹록지가 않다. 무엇보다도 미국 내 “인종·민족적 역학구도 속에서 백인과 흑인 사이의‘중간자적 존재’(middleman)로 기능해온 한국계 이민 소상인”은 쉽게 희생양(scapegoat)이 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한인상인들은 미국에서 중간자로서 “주류경제의 ‘틈새’를 메워주는 역할”을 함과 동시에 그 특유의 성격으로 인해 다양한 집단과 갈등을 겪게 되는 것이다(임진희 154에서 재인용). 실직한 뒤 고향을 찾은 톰은 일찍이 동네를 둘러보며 자신이 기억하던 큰 한인 사회―한인교회와 상점들―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흑인의 수가 거주민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음을 파악한 바 있다(42). 중간자적 존재로서 이 씨 부부를 상기할 때 이 관찰은 대단히 시사적이다. 백인들이 중점으로 거주하는 지역에 들어설 자본이 부족한 한인들은 우선적으로 흑인, 라티노 저소득층 지역을 먼저 공략한 뒤 백인 거주 지역으로 점차 상권을 확장할 계획을 세운다. 그런데 흔적도 없이 사라진 한인들, 이 씨 부부가 겪는 난항으로 미루어보건대 안전한 지역까지 차츰 상권을 확장하려는 계획은 쉽사리 좌절된다. 범죄율이 높은 저소득층 지역인만큼 그들은 무장 강도, 절도, 파업, 불매운동에 취약한 처지에 있을 뿐만 아니라 물품 공급자들의 횡포로부터도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Min 435). 경제적 중간자적 취약성으로 인해 그들은 대부분의 소비자층을 이루는 흑인 공동체로부터 너무도 쉽게 외면되고 축출된다.

이 씨 부부 또한 이 취약성을 감당해내지 못했는데, 그들은 사업가로서 잘 나가다가 결국 흑인들이 시작한 불매운동으로 인해 고꾸라지게 된다. 이 씨 부부의 사업 중단에 직접적이며 궁극적인 역할을 한 원인은 물론 물리적인 대치상황―톰이 손님에게 총을 겨눈 사건(110)―도 있지만 그에 덧붙여 모델 마이너리티 개념을 비롯해 사회에 만연한 인종적 고정관념의 영향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예컨대 이 씨 부인의 시각에서 흑인들은 항시 예의 주시해야 할 ‘잠재적 범죄자’다. 처음부터 그녀가 톰에게 단단히 일러두듯 가게에서는 특히 “검둥이들을 잘 감시해야한다”(You watch for gumdngee 16). 이 씨 부인의 노골적인 인종차별적 태도와 언사는 그녀가 우월한 백인과 열등한 흑인 사이의 중간적 위치를 점하고 있는 모범 소수인종으로서의 아시아인의 정체성을 암암리에 수용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반면 흑인들이 보기에 아시아계 사람들은 특수한 언어로만 소통할 줄 알았는데 그것은 바로 ‘돈의 언어’다(Money is the only way you people talk. So we’re making sure you listen 130). 그들은 주소비자층을 이루는 흑인을 제대로 대우해주지도 않으면서 “동네에 와서 돈이란 돈은 다 빨아먹는”(You come in here and suck the money from the neighborhood 118) 비윤리적인 돈벌레들이다. 따라서 흑인들이 판단하기에 탐욕적인 한인에게 그들의 의사를 전달하기 가장 효과적인, 혹은 유일한 방법은 그들에게 굴러 들어가는 화폐 유통의 맥을 끊어놓는 일이 된다. 처음에는 ‘존중’(We want respect! 117)을 명목으로 시작되었던 지극히 합법적이고 평화적인 불매운동은 논란의 불길이 점차 거세어지면서 점차 약탈(looting)의 형태를 띤다. 이 지점에서 여실히 드러나는바, 애초에 이 불매운동은 단순히 비인간적으로 소비자를 대우한 한 사업가를 망하게 하려는 의도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방점은 사업가가 돈이 있는 ‘아시아계’라는 사실에 두어져 있다. 흑인들이 “우리의 돈을 빼앗고―백인이 우리에겐 인정해주지 않는―사업 기회도 모두 빼앗아 가고, 우리를 그들보다 더 열등한 존재로 취급한다고!”(148)라고 소리칠 때 그들의 증오가 향하는 대상은 평소 쌀쌀맞게 소비자들을 대우하는 이 씨 부인도, 흑인 커플에게 총을 겨누던 톰도 아니다(151). 요컨대 이 발언은 “백인지배문화가 함께 미국사를 이룩한 흑인 시민권자들에게 기회를 주기보다는 이민 온 아시아인을 두둔하는 듯한 데서 오는 좌절감”(임진희 163)을 잘 담아내고 있다.

그런데 불매운동으로 대변되는 인종갈등 양상을 꼭 아시아인과 흑인의 대립구도로서만 볼 수는 없는 일이다. 마지막에 식료품점 앞에 진을 치고 있는 사람들은 비단 흑인만이 아니라 라티노와 ‘백인까지’ 포함한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183). 즉 소수민족들만이 아시아인을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란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요컨대 이 씨 부인(아시아인)은 흑인을 멸시하는 태도를 보일 수는 있지만 감히 백인지배사회로는 진입할 수 없는데, 아시아인들에게 붙여진 모델 마이너리티 이미지에서 “마이너”는 ‘백인지배계급의 마이너’, 바로 그 뜻에서 붙여진 수식어였던 것이다. 이선주의 말을 빌리자면, 모델 마이너리티 유형화는 “미국주도세력이 아시아계에 대하여 어떤 한정선을 그어놓는 경계짓기”(64)로도 기능한다. 동시에 다른 소수민족들은 마치 백인의 은혜라도 입은 양 행동하는, 점진적으로 미국 내에서 경제력을 확장해나가는 아시아인에게 피해 의식과 분노를 표한다. 따져보면 모두가 모델 마이너리티 신화의 구속력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보잘것없지만 그래도 꾸준히 자라나던 “모든 것”(everything 18)을 약탈당한 이 씨 부부에게는 종국에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nothing 208). 하지만 그들은 그 과정에서 무능한 공권력을 위시한 갖가지 문제들을 공론화시키려 하기보다는 무거운 짐을 홀로 떠맡고 가기로 결정한다. 자신들의 실패를 딸에게 인정해야 하는 이 씨 부부는 자신들이 이민 1세대로서 좋은 “본보기”(example 224)가 되지 못했다는 생각에 괴로움을 토로한다. 혹여나 준에게 “그녀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는 깨달음”(That everything can be taken away no matter how hard she tries 224)만 주게 된 것은 아닐까? 그러나 연이은 내적 갈등 후 결국 도출되는 결론은 “아니다. 성공하지 못한 것은 그들이 충분히 열심히 일하지 않았기 때문”(No. If they did not succeed, it was only because they did not work hard enough 224, 필자 강조)이라는 것이다. 소위 아메리칸 드림이라고 불리는 미국 성공 신화를 부정하는 순간 이 씨 가족이 미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자 하는 시도는 모두 무가치한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그들은 사회적 문제의식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기보다 모순과 역경 속에도 일말의 ‘희망’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기로 결심한다.

매번 자신을 책망하고 자괴감을 느끼며 살기란 쉬운 일이 아닌데 그렇다고 해서 현실 문제를 개선할 수 있는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은『액체근대』(Liquid Modernity)에서 자신들의 비극의 원인을 가능한 한 명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상황의 복잡성을 애써 축소하려 분투하는 개인들의 경향을 지적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체제 모순에 대응할만한 효과적인 해결방안이 부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종의 “상상의 해결책”을 필요로 하게 된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이 해결책이 “합리적이고 실행 가능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는 그 과제나 책임에서 ‘개인화’와 한편이거나 동등한 것”(63)이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이 경향은 이 씨 부부에게서도 발견되는데, 그들은 결국 자신들이 태만했기 때문에 이러한 비극이 초래되었다고 생각하며 자기계발적 해법으로 눈을 돌린다. 그들이 전보다 더 뼈저리게 노력하면 다음번엔 이룰 수 있으리라. 특히 이민 1세대가 모든 성패의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는 경향은 여러 변수에도 불구하고 과감히 미국행을 택해 성공을 입증하려 했던 개척자 정신(frontier spirit)의 영향 탓도 있다. 이처럼 미국은 모두에게 평등한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에 개인이 성실하게 일하기만 하면 물질적, 정신적 성공으로 보상 받을 수 있을 것이란 아메리칸 드림 신화는 위기에 봉착했다가 결국 (파산한) 개인에 의해 다시 수호(재생산)된다. 임진희의 말을 빌리자면 “경제적 중간자의 꿈의 포기가 곧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정이 되는 사회구조적 맥락”(161)이 작용하는 상황인바, 이 씨 부부는 모범 소수인종으로서의 이미지에 영합하기 위해 조만간 또 다른 도약을 준비할 터이다.

 

인용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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