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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기록

[영문학] T.S. 엘리엇의 J. 알프레드 프루프록의 사랑노래 / T.S. Eliot - The Love Song of J. Alfred Prufrock

by 나의달님 2021. 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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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정돈된 분석 글은 아니고, 예전에 읽고 떠오르는 생각을 정리했던 것입니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황무지(The Waste Land)로 유명한 T.S. Eliot 의 다른 시 "J. 알프레드 프루프록의 사랑 노래"입니다. 

단상 (1) 

시는 시작(詩作)―창작의 고통을 진솔하게 담아내고 있지 않은가. 귀도 몬테펠트로(Guido da Montefeltro)가 제사(epigraph)에서 밝히는 바, 그가 단테(Dante)에게 자신의 수치스러운 과거를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는 그의 고백이 살아있는 사람들의 세계(the world of the living) 세인의 귀에 닿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오명에 대한 두려움(fear of infamy)에 떨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이는 청자를 껍데기로만 내세우는 수신처가 없는 이야기―사랑하는 이에게 결코 닿지 못할 연가(love song)인 것이다. 그런데 엘리엇(T. S. Eliot)이 전면에 내세우는 화자 프루프록(Prufrock)은 어쩔 수 없이 현세와 관계를 맺고 있고, 타인의 시선을 쉬이 의식하는 소심하고 한없이 무력한 인물이기에 계속해서 주저하고 두려워하며 행동을 자꾸만 지연시킨다. “시간이 있을 거야”(There will be time)라는 강박에 가까운 반복, “살해하고 창조할 시간”(time to murder and create 28)―글의 부분 부분들을 다듬고 파기하고 재창조할 시간―에 대한 갈구, “내가 감히 우주를 뒤흔들 수 있을까?”(Do I / Disturb the universe? 45-46)란 자신의 능력에 대한 회의, 자기비하(작디작은 커피 스푼으로 잴 수 있는 삶을 살아온 51) 등이 얼키설키 얽혀 그는 자꾸만 “옆길로 새 나가고”(digress), 거듭 자신이 “의도하는 바를 말하기가 불가능하다”(It is impossible to say just what I mean! 104)는 사실만 통렬하게 깨닫는다. 종국에 가서 그는 인어들(Mermaids), “Muse”에게 외면당한 채, 그가 아무리 “we”, “us”라는 대명사를 써가며 그들과의 동질감을 확보하려 애를 태울지라도 물 위로 떠 오를 길을 모르는 그 혼자만 언어와 번민의 바다에 익사(drown 131)한다. 자기표현이 불가능해진 현실과 욕망의 좌절은 시를 쓰는 과정의 고통을 진득하게 담아내고 있다.

단상 (2)

이 시에서 다소나마 긍정적인 해석을 이끌어낼 수는 없을까. “아니야! 나는 햄릿 왕자가 아닐 뿐더러 그런 사람이 못 되지!”(No! I am not Prince Hamlet, nor was meant to be;)라는 부인(negation)에 이어 등장하는 행들은 프루프록이 자신을 햄릿 왕자보다는 오히려 수행원(attendant) 폴로니어스(Polonius)와 더 동일시함을 보여주는 듯하다. 왕자에게 조언을 해주는, 공경을 표하고(deferential)―굽실거리고―자신이 쓸모가 있음에 기뻐하고(glad to be of use), 교활하고(artful), 조심성 있고(cautious), 치밀한(meticulous). . .하지만 결정적으로 때로 거의 백치(왕의 어릿광대)나 다름없는(Almost, at times, the Fool)(111-19) 폴로니어스. 앞에서 열거한 특성들은 모두 폴로니어스가 피바람 부는 정계(政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취해야 했던 생존전략이었다. 프루프록은 자신이 햄릿보다는 폴로니어스와 유사한 전략을 취하며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하는듯하다, 끊임없이 타인의 시선에 자신을 재단하고, 또 기죽어가기도 하며. 굳이 연관을 시켜보자면, 폴로니어스의 어릿광대와 같은 면모는 아마 햄릿이 구름을 보며 낙타의 모습과 같다고 하면 그가 동의하고, 족제비와 같다고 하면 또 그것에 동의하고, 고래와 같다고 하면 그것에도 마지못해 동의하는―즉 햄릿의 조롱 앞에 공공연한 바보가 될 수밖에 없는 폴로니어스의 모습을 상기시킨다(3막 2장)―다른 이들의 시선(eyes) 앞에서 핀에 박혀 버둥거리는 곤충과도 같은 프루프록 연상(55-58). 커튼 뒤에 숨어 있다가 햄릿에게 살해당한 후 폴로니어스가 생전 뱉은 마지막 대사가 “Oh, I am slain!”이라는 자신의 죽음에 대한 공지이듯, 프루프록도 작품의 결미에서 자신의 죽음을 알리는데, 여기에서의 죽음은 “폴로니어스의 죽음”이고, 햄릿은 아직 살아있다고 볼 수 있을 터이다. 결국 시인이 시에서 하는 작업은 (진정한 자기 자신이란 없는) 폴로니어스식 삶을 종결짓는 일이다. 폴로니어스가 지나친 사색의 표본이지만, 결국에는 액션을 취할 줄도 아는 덴마크 왕자 햄릿에게 죽임당하듯, 이 시는 깊이 있는 사색과 더불어 그것(사색)이 설령 나를 멈칫거리게 할지라도 결국에는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는 삶으로의 초대인 것이다. 

피드백:

내가 햄릿을 읽은 지 오래되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햄릿의 행동은 사색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우발적인 행동에 가깝다는 의견을 들었다. 사실 그 부분은 생각을 해보았었지만, 우발적 행동 전에 꼬리에 꼬리를 물었던 사색의 중요성도 간과할 수 없다고 봤다.그래도 이 질문은 조금 재고해 볼 필요가 있겠다.

 

수강생 대부분이 시를 부정적으로 해석했지만 교수님께서는 이 시를 긍정적으로 해석하셨다, 애초부터.
두 번째 질문을 Baptism 익사와 관련지어 재생의 이미지, murder + create에 착안하면 좋을 것 같다고 코멘트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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