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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모리슨의『고향』에 나타난 과거 다시 쓰기
Ⅰ
토니 모리슨(Toni Morrison)의 열 번째 소설『고향』(Home, 2012)은 소설 전반에 드리워진 암울하고 궁핍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한 줄기 희망을 짙게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고향』은 프랭크(Frank Money)와 씨(Cee; Ycidra)라는 한 흑인 남매가 조지아(Georgia)주에 위치한 작은 마을 로터스(Lotus)를 떠나 모종의 대안공간을 찾으려다가 실패한 뒤 결국 원점으로 복귀하는 재귀적인 구조를 보이고 있다. 이들이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로터스는 소수의 흑인들이 군집해 사는 공간인 만큼 상대적으로 인종차별적 현실로부터 자유롭다는 이점이 있지만, 궁극적으로 낙관적인 미래가 결여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남매는 로터스의 시간은 흐르지 않고 침체되어 있는, 혹은 퇴보하고 있는 것이라 인식한다. 그러나 고향을 떠나 사회에 만연한 인종차별을 피부로 체감하게 된 이들은 한국전쟁, 생체실험, 이성과의 결별 등 다양한 사회적, 개인적 아픔을 겪게 되고 다시 찾게 된 로터스에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는 바로 그들이 그간 로터스를 바라볼 때 그 장소와 본인이 가진 어떤 접점도 찾지 못했고 따라서 일말의 소속감은커녕 항상 겉도는 자신의 모습만을 발견했었다는 점이다. 그들이 시종(始終) 로터스를 언제고 등지고 떠날 수 있는 곳으로, 자신과 철저히 분리된 곳으로만 인식했으므로 이 공동체가 가진 나름의 가치는 한 번도 그 존재를 드러낼 수 없었던 것이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이들은 방관이나 비판보다는 관심과 참여로 하여금 로터스를 이전과는 현격히 다른 장소로 재건해낼 수 있게 된다.
원점에 대해 말하자면 무엇보다도 이 남매가 함께 경험했던, 그간 이들의 전반적인 삶을 지배해 온 가장 큰 트라우마의 존재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작품의 서두를 장식하기도 하는 이 존재는 바로 아주 어렸을 적 아직 숨이 완전히 끊어지지 않은 흑인 남성의 매장 장면을 숨죽여가며 목격한 일이다. 프랭크는 “난 정말이지 매장 장면에 대해선 잊었어. 그보다는 말들의 모습만을 기억했지”라고 둘러대며 사건을 애써 들춰내 직면하려하기보다 의식의 수면 아래로 밀어내려들지만 끝내 완벽히 은폐하기에는 실패한다. 결국 작품의 말미에서 남매는 흑인 남성이 잠들어있는 곳을 되찾아 유골을 수습해 그를 정성껏 재매장해주는 의식을 치른다. 작품은 이처럼 매장에서 시작해 매장으로 끝난다. 이때 눈 여겨 볼만한 사실은 매장 행위는 산 자와 죽은 자를 가장 가까운 지점에서 대면하도록 주문한다는 점이다. 마치 아이다(Ida)가 씨를 낳고도 “죽음이 갓 만들어진 생명을 발견하고 먹어치우지 않는”(40)다는 사실이 확실해질 때까지 이름을 부여하길 주저하면서 기다리던 그 유예기간, 꼭 그 아흐레의 기간처럼 매장 행위에 있어 삶과 죽음은 가장 긴밀한 지점에서 서로 만난다. 이는 곧 과거가 그 자체로서 숨 쉬지 않아 어떠한 효력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항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런데 작품의 말미에서의 매장은 긍정적인 함의를 짙게 드러내지만, 주지하다시피 작품의 초반에서 매장은 부정(不正)한 일을 ‘은폐’하려는 부정적인 성향을 보다 짙게 드러내고 있다. 작품에서 이러한 식의 은폐는 결코 성공적으로 이뤄지는 법이 없으며 억압된 존재는 항상 재조명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흥미로운 점이라면 이와 같이 잘못된 매장(은폐)과 역매장, 즉 발굴은 한 번이 아니라 작품에서 반복되어 나타나는 패턴이라는 사실이다. 본고는 바로 이 은폐와 발굴의 양상을 다양한 층위에서 살펴보려 한다. 우선 작가인 모리슨을 포함하여 작품의 주요 인물인 프랭크와 씨가 어떻게 그동안 감춰져있던 혹은 잘못 인식되었던 과거를 재발견하고 그에 수정을 가하려하는지 그 양상을 살펴본 뒤 작품의 대표적인 매장 장면을 분석하려 하는데, 이는 익명의 흑인 남성의 사례를 일컫는다.
Ⅱ
과거의 발굴 작업의 선두에 선 자는 다름 아닌 작가 모리슨이다. 구글(Google)에서 진행된 토렌스 분(Torrence Boone)과의 인터뷰에서 어떻게『고향』이라는 작품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냐는 질문에 모리슨은 “50년대에 미국인들이 가진 인식의 껍질 혹은 딱지를 벗겨내는 일에 관심이 있었다”라고 하면서 말문을 연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50년대는 종전 이후 맞은 경제적 호황으로 인해 멋지고, 안락하고, 아메리칸 드림이 현실화되었던 시기로 흔히 인식되곤 하지만, 모리슨 본인은 그러한 공공연한 사회적 인식이 잘못되었다고 여긴다. 그녀가 보기에 그러한 화려한 겉모습을 지닌 환상이 지탱될 수 있기까지는 수많은 사실들이 침묵을 강요받고 급기야 망각되어야 했다. 그녀는 침묵과 망각의 과정을 거쳐야만 했던 사건들로 전쟁이라고 불리지도 못하고 아예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이란 별칭을 달게 된 한국전쟁, 맥카시즘(McCarthyism)으로 대변되는 당대 만연했던 반공주의(anti-communism) 정서,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대상으로 삼아 이뤄진 폭력적인 생체실험들이 50년대에 엄존했음을 지적한다. 이렇게 뚜렷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모리슨은 작품의 짧은 길이나마 양차 세계대전, 대공황, 한국전쟁, 인종차별적 관습 등 오래된 역사를 쭉 훑어 내려간다. 그 과정에서 백인우월주의 단체인 쿠 클럭스 클랜(Ku Klux Klan), 짐 크로우(Jim Crow Law) 법, 주트 수트 폭동(Zoot Suit Riots) 등에 대해 암시하는 대목들을 끼워 넣게 되면서 소수 민족―특히 흑인―에 대한 차별과 억압의 생생한 현실에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그런데 모리슨은 자신이 살기 좋던 시대로 여겨지는 50년대의 이면을 적나라하게 들춰낸다고 말하면서도 과거를 다시 쓴다고 할 때 재현에 불가피하게 수반되는 불일치와 간극의 존재를 예리하게 인지하고 있다. 실제로 작품은 이탤릭체로 나타나는 프랭크의 1인칭 시점 서술과 서술자의 3인칭 시점 서술이 교차해나가면서 진행되고 있는데, 독자들은 3인칭 서술이 프랭크에 의해 번복되고 도전받는 상황을 어렵지 않게 발견해낼 수 있게 된다. 이를테면 텍사스(Texas)에서 쫓겨나 루이지애나(Louisiana)를 넘어가는 도중에 경험한 무더운 날씨에 대해 언급하면서 프랭크는 “당신이 이게 어떤지 안다면 한번 묘사해 봐”(41)라고 서술자에게 으름장을 놓는가 하면, 한국전쟁에 대해 얘기하면서 “당신은 상상도 못 할 거야. 그 자리에 없었으니까”(93)라고 단언한다. 이렇게 모리슨은 3인칭의 일견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보이는 서술에 너무 큰 권위를 부여하지 않도록 조치하는데, 특히 전쟁의 경우에는 “역설적이게도 전쟁과 그로 인한 상처의 재현불가능성을 인정함으로써 그 재현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박형신 109). 무엇보다도 시카고(Chicago)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린칭을 당한 흑인 커플을 묘사하던 서술자는 “남자는 집에 가면 여성을 때릴 거야, 프랭크는 생각했다”(26)라면서 프랭크의 내면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듯싶지만, 이후 프랭크는 이러한 진술을 번복시킨다. 그는 1인칭 서술로써 “사실이 아냐. 난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어”(69)라고 분명히 밝히며 본인은 오히려 남성이 여성을 내심 자랑스러워했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다양한 관점에서 상황을 바라보도록 함으로써 모리슨은 절대적인 재현에 대한 환상을 깨부수고 동일한 사건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누누이 상기시킨다.
한편 미국의 인종차별의 역사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을 만큼 굉장히 뿌리가 깊은 것이므로 모리슨은 결코 남매가 직접 경험한 20년 남짓한 세월에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특히 남매가 직접 경험하지 못한 사건들에 있어서는 주변 인물들의 진술들을 통해 암시하는 모습을 보여주게 되면서 프랭크와 씨의 경험에 어느 정도 보편성을 부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예컨대 빌리 왓슨(Billy Watson)과 프랭크가 처음 만나게 된 식당에서 일하는 종업원이 자신이 버려진 집에서 약 1년 간 몰래 거주했던 기억에 대해 언급하자 식당에 있던 손님들은 일제히 “30년대 겪은 자신의 불우한 경험 이야기를 가지고 경쟁”(28)하려 들기 시작한다. 이후 프랭크가 흑인 남성의 매장 사건의 전말에 대해서 알아보려 할 때에도 마찬가지의 상황이 벌어진다. 그는 마을에서 산 지 오래된 노인들을 찾아가는데, 할아버지 세일럼(Salem)을 비롯해 피쉬 아이(Fish Eye)와 같은 노인들은 프랭크의 질문에 대한 답변에 하나둘씩 살을 덧붙이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코러스가 되었다”(139). 작가는 이처럼 “로터스 노인들의 증언을 통해서 그리스 비극에서 코러스가 담당했던 역할과 효과―비리와 부정한 사건에 대해서 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집단적 의식으로써 증언하고 고발하는―를 얻고” 있는 것이다(박형신 104-05). 잘못 인식되어온 역사를 재발견하고 재기록하려는 모리슨의 의도에서 탄생한『고향』의 주요 인물인 프랭크와 씨 또한 그간 매장당한, 즉 억압되어 온 과거를 발굴하고 마주하게 되면서 긍정적인 변화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Ⅲ
프랭크와 씨 또한 불편하기 때문에 외면하지만 끝내 해소되지 않는 자신의 과거를 마주하게 되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을 얻게 되는 모습을 보인다. 프랭크의 경우 로터스를 떠나게 된 계기가 한국전쟁에의 참전이었는데, 그는 전쟁에서 돌아온 지 일 년 정도 되었지만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술, 도박 등에 탐닉하며 끝없이 배회하는 일상만을 반복한다. 식당에서 만난 빌리가 어느 지역 출신인지 묻자 “[...] 한국, 캔터키, 샌 디에고, 시애틀, 조지아. 어디든 말만 해요. 그곳 출신입니다”(28)라는 프랭크의 답변은 정처 없이 떠도는 그의 분산된 정체성을 잘 보여준다(권혁미 119). 그도 그럴 것이 유년 시절에 로터스에서 생활을 그나마 견딜 수 있게 만들어준 것은 마이크(Mike; Michael)와 스터프(Stuff; Abraham)였는데 불운하게도 두 친구 모두 전장에서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편한 호흡과 상처 입지 않은 모습”(15)이 두 친구의 가족에게 “모욕”(15)이 될 것이라 여긴다. 미국에 돌아온 후에도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STD)에 시달리는 프랭크는 계속해서 이상한 환영을 본다든지 잠을 자는 중에도 마치 전시(戰時) 상황인 것처럼 신변에 위협을 느끼는 상황을 경험하게 되면서 한시도 편히 안식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프랭크의 불안정한 생활은 릴리(Lillian Florence Jones)를 만나면서 어느 정도 해결되는 것 같다. 릴리는 프랭크를 잠정적으로나마 진정시켜줄 수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무감각, 약속 불이행, 침체, 기억상실, 분노”(권혁미 120)는 프랭크의 일상 곳곳에 틈입해 있는 것이기에 둘의 원만한 관계는 오래 유지되지 못한다. 특히 “로터스에서는 미래가 없다는 사실을 미리 알 수 있었”(83)기에 참전하게 되었던 프랭크의 목표는 역설적이게도 전쟁 이후 “살아 있기”(76)로 축소되고, 야무진 수예 솜씨와 강인한 생활력으로 매순간 미래를 꿈꾸는 릴리는 그의 미래와 자신의 그것이 양립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점차 통렬하게 깨닫게 된다. 프랭크가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의 생명이 위태롭다는 소식을 듣고 릴리의 금전적 도움을 받아 떠난다고 했을 때 릴리는 고작해야 “한 번의 불규칙한 맥박”(75)을 느낄 뿐이었다. 릴리는 프랭크가 떠난 자리에 새로이 자리 잡은 반짝거리는 “진짜 돈”(81)를 보면서 “자신만의 집을 위한 열망”(75)으로 실패한 관계에 대한 아쉬움을 덮는다.
그런데 마침내 자신이 속할 수 있는 집을 찾았다고 생각한 프랭크가 속절없이 다시 ‘집-없음’의 상태로 돌아가므로 릴리와의 만남이 오로지 부정적인 잔재만을 남겼다고 생각하긴 어렵다. 프랭크는 자신의 내면에도 나약한 모습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릴리와의 만남을 통해 인정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네 살 터울의 여동생 씨와 함께 자라면서 프랭크는 내내 두렵거나 약한 모습은 숨긴 채 “열성적인 히어로”(84) 역할을 자처해야만 했다. 그는 씨를 “언제나 보호하고 진정시켰다. 그녀가 마치 새끼고양이라도 되는 것처럼”(88). 이러한 동생과의 관계는 그가 다른 여성과 관계를 맺는 데에도 크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릴리 이전에 그가 정기적으로 만남을 가졌던 두 여성이 있었는데, 그는 그 여성들 안에 내재한 “망가지기 쉬운 작은 것”(67)의 존재를 발견하길 즐긴다. 그는 여성들의 외형이나 성격, 지성과는 무관하게 그런 작은 약점이 필시 안에 존재하고 있으며, 여린 새의 “가슴뼈”(68) 같은 그런 요소는 자신의 집게손가락만으로도 쉽게 박살낼 수 있는 것이라 여긴다. 그가 여성들 안에 있는 그런 약점의 존재를 예리하게 인지할 수 있음에 흡족함을 느끼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그는 상대방과의 관계에서 위로하거나 달래줄 수 있는 위치에 서있기를, 힘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기를 원한다. 그런데 세 번째로 만난 릴리와의 관계가 그에게 그야말로 패러다임을 흔드는 사건이었던 이유는, 그녀와 있을 때면 “작은 V형의 새의 가슴뼈가 [그 자신의] 가슴 속에 자리 잡고 둥지를 텄”기 때문이다(68). 말하자면 상대를 보호해주다가도 뭔가가 어긋날라치면 그를 박살내버릴 수도 있는 집게손가락의 위력은 프랭크에게서 릴리에게로 이동한다. 이와 같은 릴리와의 만남은 프랭크가 세상의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 큰 전환점이 된다.
아닌 게 아니라, 그간 프랭크는 친구들의 죽음이 자신이 서두르지 않아서 생긴 비극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자책해왔다. 더욱이 문제적인 상황은 그가 폭력에 폭력으로써만 맞대응하려 했다는 점인데, 친구들의 죽음 이후에도 그는 민간인을 학살하면서 분노를 달랜 바 있다. 이러한 패턴은 그에게 굉장히 오래되고 익숙한 것이다. 예컨대 그 옛날 흑인 남성의 생매장 장면을 보면서 벌벌 떠는 씨를 품에 안아서 달랬던 어린 소년은 “영웅심을 느꼈”(104)고, 누구라도 그들을 발견하거나 씨를 건든다면 “살인까지 저지를 것임을 알았다.” 프랭크는 어렸을 적 무방비 상태였던 씨에게 접근해 성기를 노출하려 했던 남성에게 가차 없이 야구방망이를 휘둘렀던 것처럼(51), 두 여성의 싸움을 지켜보고만 있던 포주가 자신을 위협하자 그가 무의식 상태가 될 때까지 폭행을 가한다(101). 이처럼 프랭크는 폭력을 행사하는 것만이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편이라고 믿는 듯하다. 애초에 한국에서 쓰레기 더미에서 식량을 구하는 소녀를 죽여야만 했던 이유도 소녀에게 성적 욕구를 느낀 그가 자신을 “자신 안에 있는지 몰랐던 그 장소로”(134) 침수시켜버리는 힘을 그녀에게 부여해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그의 치부를 공개하려 하고 있었기에 차라리 “죽는 편이 나았다”(134).
주지하다시피 소녀를 살해한 일은 프랭크를 괴롭히는 가장 큰 원인이지만, 그는 일관되게 자신은 소녀의 죽음을 그저 목도한 것인 양 서술한다. 그는 익명의 “그 보초”(101)에게 죗값을 물어야 하는 것처럼, “내 생각에는 그가 성적으로 자극을 받았던 것 같아. 그래서 죽였어야 했을 거야”(96)라고, 본인은 사건에서 단순히 제 3자의 입장인 양 둘러댄다. 하지만 씨가 자신이 앞으로 생명을 잉태할 수 없음을 알고 슬픔에 잠긴 모습을 본 프랭크는 마침내 자신이 “[친구들에 대한] 짙은 애도로 하여금 수치심을 완전히 덮어왔다”(133)는 사실을 시인한다. 그는 작품의 말미에 이르러서야 그간 은폐되어왔던 자신의 죄를 끄집어낸다. 밤이 되자 그는 쏟아지는 상념들로 인해 잠을 이루지 못하는데, 그간 “숨겨진 채로 있었던 한국 아이”(135)가 드디어 수면 위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는 어쩌면 잘못을 시인함으로써 앞으로 가중된 고통에 시달리게 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현실을 외면하면서 겨우 떠올린 자기중심적이고 자기완결적인 해법은 단 한 번도 그에게 자유를 선사한 적이 없었다. 프랭크는 친구들에 대한 애도에 가리어져있던 자신의 죄의식과 마주하면서 왜곡되어있던 자신의 역사를 다시 쓰고 어떤 상황에서든 폭력만이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는 신념에서 벗어난다. 그는 백인 의사로부터 씨를 구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적을 두들겨 패지 않아도 되었다는 것”(114)이 어떤 기분인지 안다. 그게 바로 스마트 머니라는 별칭에 걸맞은, 자신다운 “스마트”(114)한 방법임을 그는 점차 깨닫고 있었다.
자신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세상과 타인을 바라보던 프랭크는 그간 불편한 진실이 떠오르거든 타인에게 잘못을 전가하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해왔다. 로터스의 삶이 불만족스러운 이유를 고립된 로터스의 지리적 특성과 “어떤 것도 알지 못하고 알려 들지도 않는”(83) 마을 사람들의 탓인 것으로 돌려왔던 그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는 바로 그가 한 번도 주체적으로 “미래”(83)를 건설해 볼 시도를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단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은 채 지레 로터스는 어떤 목표도 자랄 수 없는 불모지라고 단정 짓고 있었다. 프랭크가 로터스를 인식하는 태도 변화는 시계라는 상징물을 통해 가장 잘 드러난다. 프랭크는 씨가 필요한 치료를 받는 동안 자신이 로터스를 떠나기 전에 가족들이 함께 살던 집을 재임대해 건물을 청소하고 보수한다. 그러던 와중 그는 손때가 탄 옛 물건들이 담긴 상자를 찾게 된다. 그 안에는 씨의 치아와 조약돌, 시계가 담겨있다. 시계는 용심도, 바늘도 없지만 시간이 멈춰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지진 않는다. 이제 프랭크에게 “로터스에서 시간이 작동하는 방식”은 “완전하고, [순전히 보는 이의] 해석에 달려있는” 것으로 느껴진다(120). 말하자면 로터스와 자아를 분리해서 보는 사고가 아닌, 로터스 안에 있는 자아를, 자아 안에 있는 로터스를 보게 됨에 따라 그 장소의 억압적 성격은 지워지고 비로소 프랭크의 ‘고향’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Ⅳ
씨 또한 프랭크와 마찬가지로 모종의 깨달음의 과정을 거치게 되면서 로터스에서 고향의 의미를 찾을 수 있게 된 인물이다. 오랫동안 씨는 로터스가 끝까지 자신을 “무식한”(47) 존재로 남게 만드는, 자신의 배움에 대한 갈망을 저지하는 공간으로 간주한다. 그녀가 보기에 로터스는 “잡일과 교회 학교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곳이므로 하필 이곳만 아니었다면 “그녀는 더 똑똑해졌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47). 그녀 또한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불만에 침잠하느라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여러 차례 잃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프린시펄(Principal)은 그녀에게 구세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대도시 억양”은 물론이거니와 “지식과 방대한 경험”(48)을 갖춘 대도시 애틀랜타(Atlanta)에서 온 이 방문객은 일약 여성들의, 그중에서도 특히 씨의 선망의 대상으로 떠오른다. 씨는 프린시펄이 어떠한 발언을 하든 그에 막중한 권위를 부여하면서 그가 하는 말은 무엇이든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렇게 자신보다 교육수준이 높다고 생각되면 끝도 없이 상대를 이상화하게 되는 씨는 자신이 무언가를 능동적이고 비판적으로 생각해내지는 못하고 상대방의 말은 무엇이든 맹신함에 따라 자신을 위험에 빠뜨린다. 예컨대 씨는 스캇 부인(Mrs. Scott)과 대화하면서 그녀를 마치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여왕 같다고 여기고 그녀의 목소리는 “음악”(59)처럼 들린다고 황홀해한다. 마찬가지로 “의사에 대한 찬미”(64)에 분별력을 잃은 씨는 백인의사가 “자궁 적출 실험을 통해 [자신의] 출산을 통제”하도록 내버려둔다(한재환 45). 그녀는 배움의 기회를 갈망했지만, 정작 로터스를 떠나서 그녀가 뭔가를 학습하는 방식은 “자신의 배움이 얼마나 보잘 것 없고 무용(無用)한지”(65)를 애석히 여기면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이용할 기회를 제공하는 식이었다.
프랭크와 마찬가지로 씨는 자신의 주변 환경을 열렬히 탓하지만, 정작 그러한 환경 안에서 자신이 맡을 수 있는 역할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는 우를 범한다. 프린시펄과 같은 인물이 언젠가 나타나 자신을 대도시로 데려갔던 것처럼, 로터스를 떠나기만 한다면 마법처럼 문제들이 해결될 것이라 믿었던 그녀는 계속해서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태도만을 견지한다. 그 결과로 프린스에게 정신적인 상흔을 입고, 백인 의사에게는 육체적인 상흔을 입는다(박수정 57). 그러던 그녀는 오빠의 도움으로 구출되어 로터스에 당도해 두 달 동안 현명한 마을 여성들의 보살핌과 지혜 아래에서 값진 성장의 계기를 맡게 된다. 마을 여성들 각각이 자부하는 자연요법으로 건강을 되찾은 그녀는 함께 퀼트를 짜는 작업에 ‘참여’하게 되고, 그들의 이야기와 노래, 조언에 그 전에는 주지 않았던 관심을 처음 기울일 수 있게 된다(123).
따져보면 마을 여성들 모두는 씨처럼 나름의 아픔을 가진 존재들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개인적인 트라우마가 사회적인 골절을 일으키지만, 한편으로 더 강력한 소속감을 만들어낸다”는 역설을 몸소 보여주고 있다(권혁미 124 재인용). 개인적, 집단적으로 경험한 상처를 부정적인 것으로만 여기지 않고 도리어 공동체를 더욱 굳건히 만들어 줄 거름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프랭크와 씨의 예전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본인들의 삶과 그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무엇이든지, 누구든지 책임을 지고 있었다”(123). 그들은 씨에게 있는 그대로 자신을 존중하는 법을 가르쳐준다.
에셀 포드햄(Ethel Fordham)에게 앞으로 불임으로 살게 될 것이라는 소식을 들은 씨는 다시 한 번 자신의 가정환경과 그로 인해 학교교육이 미진했다는 사실로 하여금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에서 본인에게는 어떤 잘못도 없었다고 여기려 한다. 본인을 단순히 피해자로서만 단정하려 드는 씨는 여전히 자신의 고유한 역할과 책임은 방기하려 들고 있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자신만의 방법으로 그러한 약점을 보완하려 하는 마을 여성들의 지혜를 떠올리며 그러한 핑계가 실효성이 없음을 깨닫는다. 이내 모든 것을 과거에 이미 결정되었던 것인 양 여기려드는 씨는 다른 탓할 거리를 탐색해본다. 생각이 다다른 곳에는 자신에게 “부랑아”(gutter child)라는 꼬리표를 부여해준 르노아(Lenore)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엄마 아이다조차 한 번도 자신을 소중히 여겨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씨는 가족에 대한 원망 또한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데, 다름 아닌 프랭크가 항상 자신의 곁에 있어줬기 때문이다. 이와 동시에 씨는 “그의 헌신적인 애정이 그녀를 보호할 수는 있지만 그녀를 강하게 만들지는 못했”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된다(129).
그러나 예전처럼 프랭크 때문에 자신이 무력한 존재가 되었다고 여기기보다, 씨는 처음부터 자신을 강한 여성으로 만들 수 있는 존재는 자신밖에 없었다는 사실과 마주한다. 엄마는 물론이고 쎌마(Thelma)와 새라(Sarah Williams) 등등 자신이 만났던 여성들은 하나같이 강인하고 책임감 있는 여성들이지 않았던가. 그녀는 마침내 그동안 간과되어왔던 “그녀 자신”(129)의 존재를 찾게 된다. 이러한 결과물은 그녀가 자신만의 사유로써 얻은 첫 번째 의미 있는 수확물인 셈이다. 프랭크와 마찬가지로 씨 또한 자신의 과거에는 항상 가장 중요한 자신의 역할이 빠져있었음을 깨닫게 되면서 과거를 새로운 시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고, 정다운 고향을 얻게 되는가하면 자신을 존중하는 삶의 첫 장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Ⅴ
지금까지 작가 모리슨으로부터 시작해 프랭크, 씨라는 인물이 어떻게 과거를 재조명(발굴)하고 그에 수정을 가하면서 긍정적인 변화 가능성을 보여주는지 살펴보았다. 이와 비슷한 패턴은 사실 프랭크와 씨가 목도한 흑인 남성의 생매장 장면에서도 엿볼 수 있다. 프랭크와 씨는 “무서운 경고 표지판”(3)의 존재를 무시하고 다다른 곳에서 이미 파여져 있는 구멍에 한 남성을 아무렇게나 매장해버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한 발이 가장자리에 걸쳐져 떨렸”(4)지만 쇄도하는 흙더미의 무게에 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씨와 프랭크는 자신의 것과 같은 “검은 발”(4)을 가진 이의 죽음을 보고 굉장한 충격에 사로잡히지만, 이후 사건의 전말에 대해 알아보려 하기 보다는 의식적으로 그 장면을 잊으려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이때 지하로 하강하는 남성의 시체에 반해 지상에 우뚝 서있는 생명력 넘치는 말들의 존재는 좋은 눈가림의 수단이 된다. 말 그대로 “[말들은] 마치 사람처럼 서 있었다”(5).
하지만 프랭크의 예상과는 달리 말들은 그러한 트라우마 장면의 기억을 잠재워주지 못한다. “매일 밤이면 암말이 등장했”고, 자연스럽게 매장 장면이 그 뒤를 따랐다(33). 로터스를 다시 찾은 프랭크는 우선 그 장면의 배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알아내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는 씨에게 먼저 그 장소에 대해 질문해보지만, 씨는 만족스러운 답변을 내놓지 못하고 프랭크는 곧 세일럼을 찾아가게 된다. 투견장으로 쓰였다고 생각했던 건물은 이미 “불타 없어진”(138) 뒤였지만 마을 노인들의 의식 속에 그 장소에서 일어난 일은 “10년 혹은 15년이라는”(140) 상당한 시차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생생하게 각인되어 있다. 곧 프랭크는 앨라배마(Alabama)에서부터 포박된 채 끌려와 서로 칼을 들고 싸우도록 강요받은 제롬(Jerome) 부자의 이야기에 대해 듣게 되면서 익명의 흑인 남성의 죽음에 진정 애도를 표할 수 있게 된다.
씨가 처음 만든 퀼트를 가지고 기억을 더듬어 매장 장소를 찾아간 프랭크는 땅을 파기 시작해 “너무도 작은 뼈들”, “몇몇 천조각” 그리고 환히 웃고 있는 말끔한 두개골과 마주한다(143). 이내 프랭크는 알록달록한 씨의 퀼트를 수의 삼아 위에 생전의 모습과 가장 비슷하게 뼈들을 정돈해본다. 모리슨은 크로포드(Crawford)라는 노인의 죽음과 그의 증조할머니가 심었던 “카운티에서 가장 오래된 목련 나무”(10)를 결부 지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제롬의 아버지를 재매장해줄 때도 생명력이 강한 “월계수”(144)를 등장시킨다. 긴 세월이 무색하게 굳건하게 자라 뿌리를 사방으로 펼치고 있는 나무는 흑인 고유의 오랜 역사와 전통, 정체성을 상징한다. 월계수의 모습 자체는 많은 풍파를 견뎌온 것처럼 엉성하였으나 분명히 죽은 것은 아니었으며, 프랭크가 나무 부근으로 묏자리를 두려하자 그 뿌리는 완강한 힘으로 버틴다. 하지만 “불굴의 생명력과 회복력”을 자랑하는 나무는 곧 자리를 함께 나누는 일을 허락한다(박수정 61). 그 나무는 프랭크의 “여기 사람이 서 있다”(Here Stands A Man)(145)라는 말에 기꺼이 동의하고 있었다. 프랭크에 의해 “무덤의 주인은 다만 인종주의적 폭력의 희생자가 아니라 아들의 생명을 위해 자신의 죽음을 선택한 [한 사람으로서] 기려진다”(박수정 61). 과거를 결코 잊는 일이 없기에, 흑인들의 삶은 비록 “상처 입었지만” 그래도 분명 “건재하다”(147).
Ⅵ
모리슨의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꼽히는『빌러비드』(Beloved)는 노예제도가 폐지되기 이전의 시기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박형신 97), 이 작품에 실린 작가의 말은『고향』과 많은 측면에서 공명한다.
노예 경험이 피부에 와 닿게 하려고 애쓰면서, 나는 통제 하에 있으면서 동시에 통제를 벗어나 있는 것들의 느낌이 처음부터 끝까지 설득력 있게 전달되기를 희망했다. 일상의 질서와 평온이 궁핍한 사자死者들의 대혼란으로 산산이 깨져버리기도 하고, 어떻게든 잊으려는 초인적인 노력이 어떻게든 끈질기게 살아남으려는 기억에 의해 위협받기도 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노예 상태를 개인적 경험으로 표현하려면, 언어는 길을 벗어나야만 한다. (454)
불편한 기억을 마주하기란 분명 굉장한 고통을 수반하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외면하거나 망각하려는 노력은 모리슨이 생각하는 최선이 아닐뿐더러, 생각만큼 쉬운 해결책이 되어주지도 못한다. 따라서 작가는『고향』에서 주인공들이 깨달음의 모험을 떠나도록 하고, 주트 슈트를 입은 남성 등 초자연적인 존재를 등장시키는가 하면, 역사의 산증인들이라고 할 수 있는 마을 여성과 남성의 힘을 빌려 주인공들이 과거를 재기억하고 다시 쓸 수 있도록 조치한다. 특히 작품에서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매장 장면은 산 자와 죽은 자가 교류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준다. 그런데 작품 초입에 등장하는 터가 지나칠 만큼 조숙한, 부정적이고 회피해야 마땅한 것이었다면, 작품의 말미에서 등장하는 터는 과거의 내용을 정신 속에 기꺼이 보존하려는 노력이 있기 때문에 더 머무르고 싶은 긍정적인 공간으로 변모한다. 바로 이러한 변화가 자리 잡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모리슨은 프랭크가 “과거의 상처 또는 트라우마를 재생하기 위한 ‘기억 속으로의 여행’”을 떠나도록 하고(이영철 120), 씨가 마을 여성들의 일상에 참여해보도록 촉구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둘의 경험은 분리된 채로 존재하진 않는다. 결국 남매 “상호간의 사랑과 응원이 극심한 트라우마적 경험과 대면하고 궁극적으로 그것을 통합할 수 있게 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Visser 149). 따라서 소설의 결말은 동화적이다. “잊혀진 헨젤과 그레텔”(53)은 역경 끝에 집으로 돌아와 행복을 찾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그들은 “상흔을 간직한 회복”(이영철 141)으로 하여금, 무엇이 되길 소망하느냐는 질문에 토마스(Thomas)가 “사람(남자)요”(33)라고 주저 없이 답하는 것처럼, 미국사회에서 흑인들이 평등한 인격체로, “자유로운 사람”(126)으로 우뚝 서게 될 가능성에 빛을 비추고 있다.
1) Toni Morrison, Home (London: Vintage, 2012) p. 5. 앞으로 인용할 시 괄호 안에 면수만 표기하도록 한다.
2) 주트 슈트는 아프리카계와 멕시코계 미국인에게 수용되었던 특정한 의복 양식으로서 미국 하위문화의 반항성을 상징한다. 이와 관련된 일련의 폭동이란 1943년에 처음 발생하였는데,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깊이 연루되었던 해에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와 미 동부 연안 도시 등에서 미 해군 병사들과 치카노(Chicano) 젊은이들 사이의 싸움[이] 인종문제로 확대되었던” 일을 일컫는다. (박형신 104n5)
주지하다시피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압제를 피해 도주하는 와중에도 몇몇 흑인들은 발걸음을 돌려 노인을 매장해주고 오는데, 그들에 의하면 노인의 두 눈은 도려내져 있는 상태였다. 안구는 종종 남근적 요소를 상징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노인의 사례는 흑인 남성들이 남성성을 제대로 발현하기 어려운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는 프랭크가 익명의 흑인 남성의 생매장 장면에서 초라한 흑인 남성의 모습보다는 오히려 더욱 사람처럼 서있는 말들의 모습을―그들은 프랭크가 희구하는 충만한 남성성을 상징한다―기억하지만, 나중에 말들이 “도살장행”(140)을 면치 못했다는 반전에서도 또 다시 드러난다. 프랭크가 기차에서 만난 커플의 사례도 이와 맥을 같이 한다.
인용문헌
권혁미.「토니 모리슨의『홈』에서 고향집 찾기 프로젝트」33.3 (2015): 111-30. Print.
박수정.「“이 집은 누구 집이지?”: 토니 모리슨의『집』에서 ‘낯선 집’과 ‘우리 집’ 사이 읽 기」.『새한영어영문학』59.2 (2017): 45-65. Print.
박형신.「모리슨의『고향』: 귀향과 한국전쟁」.『영미어문학』119 (2015): 93-116. Print.
모리슨, 토니.『빌러비드』. 최인자 옮김. 파주: 문학동네, 2014. Print.
이영철,「토니 모리슨의『집』: 피카레스크 소설의 변용, 인종적 피카레스크 소설」. 『미국 학논집』47.3 (2015): 117-46. Print.
한재환.「모리슨의『고향』: 인종주의, 트라우마, 공동체」.『영미어문학』111 (2013): 37-57. Print.
Boone, Torrence. 2013. “Toni Morrison: ‘Home’ in Conversation with Torrence Boone.” Authors at Google. Google, 7 Feb. Web.
Morrison, Toni. Home. London: Vintage, 2012. Print.
Visser, Irene. “Fairy Tale and Trauma in Toni Morrison’s Home.” MELUS 41.1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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