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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기록

셰익스피어의 비극 <맥베스> 리포트, 잠의 패러독스

by 나의달님 2021. 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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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xabay 사진: Cat Black Green Eyes - Free photo on Pixabay

첫 번째 글: 셰익스피어의 맥베스 / William Shakespeare - Macbeth 01 (tistory.com)

두 번째 글: 셰익스피어의 맥베스 / William Shakespeare - Macbeth 02 (tistory.com)

이 포스팅은 바로 세 번째이자 마지막 포스팅이 되겠습니다. 

 

소중한 창작물을 함부로 사용하지 말아 주세요. 


마녀들이 비록 모든 것을 결정하진 않지만 그녀들이 맥베스의 의식과 무의식에 미치는 막강한 영향력을 간과할 수는 없는 일이다. 더불어 마녀들의 존재를 단순히 맥베스 개인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내밀한 욕망, 개인적인 야욕이 형상화된 것으로만 보기도 힘들다. 왜냐하면 처음 맥베스가 마녀들과 조우했을 때 옆에는 예언을 함께 들었던 뱅쿠오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녀들이 사실은 실존하지 않음을 설명하려면 처음부터 같은 예언을 듣고도 그것에 대해 맥베스와는 극적으로 다르게 대응하는 뱅쿠오의 존재 또한 그럴듯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만 하지 않겠는가. 또한 마녀들이 단순히 맥베스가 만들어낸 허상이라고 주장하려면 ‘맥베스가 없을 때도’ 난데없이 등장하여 깊이 있는 대사들을 내뱉는 마녀들과 헤카테(Hecate)가 갖는 독립적인 중요성에 대한 합당한 해명이 필요하다고 본다. 마녀들은 분명 맥베스 내면의 투영물 그 이상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예언은 맥베스와 뱅쿠오 모두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있음이 사실이다. 그런데 맥베스가 그 예언들이 영락없이 하나씩 실현되어가는 모습을 보며 극도의 편집증적 증세를 보이고, 마녀들에게 더 많은 정보를 갈구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뱅쿠오는 능히 침착한 태도를 고수한다. 그는 기다릴 줄을 안다. 특히 던컨이 살해된 밤 뱅쿠오는 잠과 맞서 싸우길 선언하기도 한다. 그는 아들 플리언스를 옆에 두고 “견디기 힘든 잠의 소환장이 납처럼 날 짓누르는 듯하구나. 하나 나는 자지 않으련다. 자비로우신 신이여, 제가 휴식을 취할 때 굴복하게 되는 가증스러운 망상들을 억눌러주십시오!”(A heavy summons lies like lead upon me, / And yet I would not sleep. Merciful powers, / Restrain in me the cursèd thoughts that nature / Gives way to in repose)(2.1.6-9)라 기도한다. 문맥을 따져볼 때, 여기서 “가증스러운 망상들”이란 마녀들과 그들의 예언에 대한 것으로 봄이 옳다. 이 말을 하기 전 그는 이미 꿈속에서 마녀들을 다시 한번 대면했던 것이다. 그는 수면을 취하는 동안 자제력을 잃었던 자신을 탓하며, 마녀들의 예언이 자신을 지배하도록 둘 바에야 자신이 자연의 섭리인 잠을 거부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다. 따라서 뱅쿠오가 예언을 마주하며 보이는 침착함 혹은 강렬한 내적 갈등 또한 상당히 능동적인 대처로 여겨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에 반해 맥베스는 스스로 마녀들의 예언에 기어이 자신을 내어주길 자처한다. 맥베스는 그들의 달콤한 유혹에 속절없이 걸려들었다. 그가 마녀들의 영향에 얼마나 종속되어 있는지는 두 번에 걸쳐 진행되는 마녀들과의 만남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마녀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시간에 등장하고 사라질 수 있는 존재로 그녀들과 함께 있는 공간에 들어서면 맥베스에게는 수동성(passivity)만이 허락된다. 예컨대, 마녀들은 환영을 보여주면서 맥베스에게 “그의 말을 듣되 넌 함구하고 있으라”(Hear his speech, but say thou nought)(4.1.69)고 당부한다. 그런가 하면, 그녀들은 예언을 갈구하는 맥베스에게 “더 이상 알려고 하지 말라”(Seek to know no more)(4.1.103)고 명하는 것이다. 맥베스가 계속되는 환영에 눈알이 타버리는 듯한 괴로움을 느껴 “불결한 노파들 같으니라고! 무슨 연유로 이걸 내게 보여주는 것이냐?”(Filthy hags! / Why do you show me this)(4.1.114-15)라고 꾸짖어 봐도 소용이 없다. 그는 마녀들이 그에게 허락한 범위 내에서만 알 수 있고,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녀들 앞에서 무력함의 절정을 보여주는 맥베스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들이 타고 다니는 공기는 역병이나 걸리고, 그들을 믿는 자 모두 저주받았으면!”(Infected be the air whereon they ride, / And damn’d all those that trust them!)(4.1.137-38)이라고 소심한 저주의 말을 읊조리는 것뿐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은ㅡ맥베스가 그들을 믿기에ㅡ자기 자신을 저주하는 행위가 된다.

마녀들과 맥베스 사이에 권력의 불균형이 존재하듯 맥베스는 마녀들의 예언이 하나하나 실현이 되어가는 과정을 모두 확인하기 전에는 죽을 수 없는 존재다. 혹자는 맥베스가 마녀들의 예언 혹은 운명(fortune)이라는 존재에 완전히 굴복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이는 그가 삶의 의미가 모두 소진된 상태에서도 기어이 싸우고자 하는 불굴의 의지를 보여준 흔적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야말로 바로 운명이라는 존재가 끼어들 곳이 없는 자기 자신과의 실존적 투쟁이 아니냐는 주장이다. 하지만 그가 마지막에 갑옷을 완전히 갖춰 입고 나선 마지막 전투, 그 현장에서도 맥베스의 항쟁은 여전히 마녀들의 예언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본다. 그가 그나마 전장에 불굴의 의지로 나설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이 맞서 싸우게 될 수많은 병사들 중에서 여성이 낳지 않은 자가 있을 수는 없다는 일말의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맥더프와의 대치 장면에서 “나는 불사신이니, 여자가 낳은 자에겐 굴복하지 않는다”(I bear a charmèd life, which must not yield / To one of woman born)(5.6.51-52)고 당차게 선언한다. 맥베스가 맥더프에게 괜한 헛수고 하지 말라고 타이르는 모습에서 보이듯 예언의 영향만 없었다면, 무용(武勇)의 측면에서 맥베스가 맥더프를 쉬이 제압할 수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맥더프가 자신이 “불시에 어머니의 자궁을 찢고 나왔던”(from his mother’s womb / Untimely ripp’d)(5.6.54-55) 사실을 밝히자 맥베스는 맥더프와 싸우길 거부한다. 그는 마녀의 예언을 믿기 때문이다. 물론 맥베스의 마지막 대사에서 “나는 항복하지 않는다”(I will not yield)(5.6.67)라는 강인한 투쟁 의지를 확인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의 힘은 굉장히 미미한 것으로 보인다. 맥베스의 머리가 효시되는 등의 그의 죽음이 상술되는 대신에 급격한 장면의 전환이 일어나는 이유는 물론 셰익스피어가 용감한 장군 맥베스에게 표하는 일종의 예우일 수도 있겠지만, 이는 또한 맥베스와 맥더프의 싸움에서는 어떠한 반전도, 따로 특기할 사항도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지막 예언이 실현이 된 이후에야 맥베스는 드디어 잠(죽음)을 맞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극이 비극이 된 이유는 맥베스가 끝내 삶의 패러독스를 이해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은 데에 있다. 레이디 맥베스는 던컨 왕의 보초를 서는 신하들에게 약을 먹이고 만취해서 곤히 잠이 든 그들을 보고 “죽음과 자연이 그들을 살릴지 죽일지를 놓고 겨루고 있다”(That death and nature do contend about them / Whether they live or die)(2.2.7-8)고 표현한 바 있다. 셰익스피어에게 “잠”은 바로 이런 의미일 것이다, 죽음과 삶을 대변하는 자연을 모두 담고 있는 그릇 같은 존재. 그것은 죽음 속에 담긴 삶이고, 삶 속에 담긴 죽음으로서 역설 그 자체다. 그것은 조화로움이다. 극 초반에서 양성적 존재인 마녀들이 소란스러운 등장 후에 외치는 “아름다운 것은 추하고, 추한 것은 아름답다”(Fair is foul, and foul is fair)(1.1.9)라는 말이 이 극을 꿰뚫어 계속해서 변주되어가며 등장하지 않았던가. 이처럼 작품은 계속해서 이항대립 구조를 허무는 작업을 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이런 측면에서 잠은 일견 대척점에 서 있는 것 같은 두 쌍이 결코 완전한 대립 관계에 있지 않음을 증명하는 최고의 소재가 된다. 같은 맥락에서, 살아가면서 인간이 자주 망각하게 되지만, 언제나 불변하는 진리 중 하나는 살아간다는 것은 죽어간다는 사실이다. “아침을 향해”(To-morrow) 살아가는 것은 결국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 또한 얼싸안는다는 말이다. 삶과 죽음을 이분법으로 구분하려는 많은 이들에게 고된 하루 뒤 매일 밤 찾아오는 잠은 이들이 결코 대치 관계에 있지 않음을 매일같이 상기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삶과 죽음의 기로에 놓인 잠을 제거하려 들었다가 역설적으로 삶과 죽음에 대한 통제력을 모두 잃게 되는 맥베스의 삶 자체가 삶의 패러독스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니 이것을 안고 살아가라는 당부다.


​맥베스는 “삶의 매일을 종결짓는 죽음”(The death of each day’s life)(2.2.38)으로서의 잠을 자신의 삶에서 지워버림으로써, 자연의 질서에 역행한다. “죽음에 매여 있는 인간에게 가장 주된 적은 방심”(security / Is mortal’s chiefest enemy)(3.5.32-33)이다. 여기서 방심은 안심(安心)으로도 볼 수 있을 터인데, 이는 사실 죽음이 있는 이상 인간에게는 절대 주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베스는 다른 이의 생명력(피)을 앗아감으로써 자신의 두려움(fear)을 다스리고 자신의 “안심”(security)를 공고히 하고자 했다. 더 나아가 그는 마녀라는 초자연적인 존재의 힘에 자신을 의탁함으로써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지식, 즉 미래에 대한 영향력까지 확보하고자 했다. 자연스러움에서 멀리 벗어나 있는 인간인 맥베스는 더 이상 아름다울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인간이 담겨있을 수 있는, 인간의 영향이 미칠 수 있는 곳은 어딜까? 그곳은 바로 현재다. 유한한 삶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것은 지금 눈앞에 놓여 있는 현재를 사는 일이다. 맥베스라는 인물의 장렬한 최후가 말해주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일 터다. 아무리 언젠가는 무대로부터 절연될 것이란 사실을 아는 배우일지라도, 하나, 역설을 넘어설 수 없다면, 그것을 수용하고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둘, 현재를 사는 것이 필멸의 삶을 사는 인간에겐 가장 자연스럽다는 사실이다.

 

본 논문에서 사용한 텍스트는 헌터(G. K. Hunter)가 편집한 『윌리엄 셰익스피어: 4대 비극』(William Shakespeare: Four Tragedies) London: Penguin, 1994의 해당 작품에 의하며, 우리말 번역은 필자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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