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프리 초서(Geoffrey Chaucer, 1340-1400)의「학사의 이야기」(The Clerk’s Prologue and Tale) 분석
***
분석한 글에서 몇 단락만 뽑아서 가져온 거예요. 그래서 말이 서로 잘 안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소중한 창작물을 허락 없이 가져가지 말아주세요.
제프리 초서(Geoffrey Chaucer, 1340-1400)의「학사의 이야기」(The Clerk’s Prologue and Tale)에 등장하는 신실한 종교인 그리셀다(Grisilde)는 노동할 줄은 알았지만 안식할 줄은 몰랐다. 그녀는 신보다도 더 부지런한 존재로서 단적으로 말하자면 일 중독자였다. 그녀는 불굴의 인내심(patience)과 덕스러움(virtuousness)의 현신으로 널리 경외의 대상이 되곤 하지만 사실 그녀가 너무도 노동에 집착한 나머지 윤리적 판단력이 부족했다는 점을 간과할 수는 없는 일이다. 맹목적 순종이 한없이 칭송받아 마땅한가? 그녀의 피학적 행동들이 단순히 인내심이라는 좋은 말로 미화될 수 있는 차원의 문제인지 재고해 볼 필요성이 제기된다.
그리셀다의 인내심에 대한 이야기는 대단히 유명해 14세기 보카치오, 페트라르카, 초서와 같은 문학적 대가들의 관심을 끌었는데, 페트라르카는 보카치오의 이야기를 라틴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그녀의 행위들에 “종교적 가치와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그리셀다를 신에 대한 보편적 인간의 표상으로 해석”(28)한다. 이렇게 종교적 차원으로 승화된 그녀의 행위들은 너무도 범접하기 힘든 나머지 인간적인 공감을 이끌어내기 힘든 측면이 분명 존재하게 된다. 반면 초서는 그리셀다의 이야기를 전하는 “여성의 고통에 공감하는 학사”(28)를 전면에 내세우기에 흥미롭다. 학사가 이야기를 전개하며 곳곳에서 그리셀다에 대한 연민, 월터에 대한 반감을 토로하기에 초서가 “여성의 입장에서 그리셀다에 대한 해석을 시도”했으며 “인간적인 목소리를 부여”함으로써 실제 여성인물 경험을 복원해 종교적 해석으로부터 벗어나려 시도했다고 볼 수 있다(최지연 27-28에서 재인용).
***
- 인물들을 가해와 인내, 변덕과 변하지 않음 등 알레고리로만 볼 것인가, 사실적인 측면을 이 정도로 부각시켜도 되는 걸까... 생각해 볼 것
- 그리셀다의 섹슈얼리티 노동에 대해 더 연구해 볼 것
모든 일의 발단에는 요구와 그에 대한 응답이 있었으니 이 이야기는 과연 합의와 계약의 이행으로 점철되어 있음을 예견해볼 수 있다. 훌륭한 치자(治者)였던 월터(Walter)는 백성들에게 마땅히 사랑, 경외 그리고 완벽한 순종을 표해야 할 대상이었다. 하지만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말을 잘 이해하고 있던 백성들은 영주를 지극히 사랑한 나머지 그에게 한 가지 요구를 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즉 빠른 시일 내에 그가 혼인을 치르는 것이다. 이 요구는 월터 보다는 백성들의 행복과 더 긴밀한 연관을 맺는데, 백성들에게 월터의 대(代)가 끊기고 “낯선 계승자가 그의 지위를 세습하는 것”(a straunge successour sholde take / Youre heritage 138-39)이란 상상하기만 해도 비참한 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당시 월터에게 혼인이라는 개념은 자신이 즐기던 자유(liberty)를 포기하고 자발적으로 예속(servitude)에 목을 수그리는 것과 매한가지였다(145-46). 따라서 그는 그들의 요구를 수용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이 직접 신붓감을 선택하고 백성들이 그 선택에 어떤 이의 제기도 할 수 없음을 조건으로 내걸으니, 그렇게 그들은 중간 지점에서 만나 ‘사회적 합의’를 성사시킨다. 합의에 부가 조건들을 서로 덧붙여 가는 과정 끝에 백성들은 혼인식이 치러질 날짜를 월터가 즉석에서 결정하게 만들고 나서야 흡족한 마음으로 자리를 떠난다.
이 상황에서 중점이 되는 사안은 ‘월터의 자손 생산’이다. 따라서 그리셀다는 영주의 대를 잇기 위한 재생산을 명목으로 이야기의 중심으로 함입되는, 역할 수행을 목적으로 ‘고용’되는 여성이다. 자유를 제약하는 결혼이라는 멍에가 여간 탐탁지 않았던 월터는 혼인관계에서도 자신이 그토록 즐겨하던 사냥(hunting)의 즐거움을 찾고자 했는데, 비유적으로 말하면 그리셀다는 여기서 사냥감(prey)이며 월터라는 맹수가 ‘착취하기 좋은’(prey on) 대상이기에 의미가 있다. 실제로 월터는 아마 사냥을 나갔다가 그녀를 눈에 포착하게 되었을 확률이 높다(233-34). 또한 그리셀다도 못내 인정하듯 그녀는 자신을 집안의 여주인 보다는 월터의 “미천한 종”(But humble servant 824)에 가깝게 여겼다.
월터가 그리셀다를 착취 대상으로 삼음은 진정 탁월한 선택이었다. 왜냐하면 그리셀다는 노동을 위한 노동(work for work’s sake)을 행하는 인물이니 그녀 앞에서 노동에 대한 보상을 논하는 일은 무의미한 까닭이다. 보다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이는 오랜 기간 동안 여성의 가사노동은 “부불노동”(unpaid labor)으로 진행된 탓이기도 하다. 무임금으로 진행되는 가사노동은 “노동으로 인식되기 보다는 타고난 자질에서 비롯된 행위”로 곧잘 여겨지곤 한다(『혁명의 영점』38). “당신은 역시 천상여자라니까”란 말은 이런 측면에서 대단히 문제적이다. 하지만 이런 말은 많은 여성들에게 기가 막히게 먹혀들곤 하는데 그리셀다에게도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의 타고난 본성(nature)인양 묵묵히 남자들을 섬긴다. 작중 남성들이 종종 그리셀다를 서로에게 ‘주고받곤’ 하더라도 그녀는 곧잘 자신의 역할에 적응한다.
그리셀다의 고향은 근면한 노동을 통해 근근이 생계를 이어나가는 사람들의 터전인데 그녀는 그중에서도 가장 빈곤한 자(povrest of hem alle 205)인 자니큘라(Janicula)의 여식으로 태어났다. 말하자면 이들은 극빈민층에 속한다. 게으름, 물욕으로부터 동떨어져 있는 그녀는 눈이 떠져있을 때라면 양을 돌보거나 실을 잣는 등의 쉼 없는 노동을 행한다(195-96). 심지어 잠을 잘 때조차 딱딱해서 불편한 잠자리(made hir bed ful hard and nothyng softe 228)를 고집하니 그녀야말로 검소함의 표본이자 노동을 위해 태어난 인간인 셈이다. 통상적으로 사람들은 어떤 기대하는 결과가 있기에 기꺼이 힘든 노동을 마다하지 않지만 그리셀다의 경우는 다르다. 그녀에겐 가난한 하층민의 신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갈급함 혹은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욕망 따위를 찾아볼 수 없다. 또 그녀는 누추한 넝마 옷을 입든 보석들로 치장하든 간에 항시 변함없는 마음과 태도를 유지한다. 완벽한 노동자 재목인 그리셀다는 심지어 월터가 청혼을 하러 온 날에도 최대한 빨리 가사노동을 끝내고 나서야 운이 좋으면 영주 부인될 사람의 얼굴을 보겠구나 하고 있었다(283-87).
월터가 자니큘라에게 딸과의 혼인에 대한 승낙을 받은 뒤 그리셀다에게 청혼하는 장면은 공공연한 계약의 성립을 보여준다. 월터는 그리셀다에게 자신의 의사에 “결단코 푸념하지 말 것”(never ye to grucche it 354)을 당부하며 “내가 옳다고 하면 너는 아니라고 하면 안 되느니, 말이나 표정에서나 마찬가지노라”(355-56)고 엄숙히 선언한다. 이 말은 사실 굉장한 함의를 지니는데 그리셀다가 행위에서 뿐만 아니라 ‘감정의 차원’에서도 그의 뜻을 섬겨야 함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을 듣고 그리셀다는 잠시 “두려움에 떠는”(quakynge for drede 358)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이내 그가 제시한 조건들을 모두 수용하며 그의 처(妻)가 된다. 이후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일은 그리셀다가 입고 있던 옷이 벗겨지고(dispoillen), 새로운 옷이 입혀지는(clothed) 것인데(374-78), 이는 자니큘라의 종(從)으로부터 월터의 그것으로의 전화(轉化)를 상징한다. 실제로 학사는 그녀가 “변했을”(translated 385) 때 사람들이 그녀가 자니큘라의 여식이라는 것을 믿지 못했다는 점, 즉 그녀가 완연히 다른 사람으로 변모하였음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403-06).
윤민우는 “translatio”라는 단어에 세 가지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데 그중 두 가지 맥락을 여기에 소개하면 좋을 것 같다. 첫 번째는 “남성 번역자와 여성 텍스트”의 맥락이다. 초서가 이전의 그리셀다 원전들을 나름대로 ‘번역’하고 있듯이 텍스트 내부에서는 자니큘라를 비롯한 월터, 학사, 초서의 맺음말 등의 여러 남성들의 시각이 겹겹이 그리셀다를 둘러싸고 있기에 그녀에 대해 온전히 파악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월터가 누추한 옷으로 가려진 그리셀다의 가치를 예리하게 파악하고 자신이 부여한 옷을 입히듯, “남성의 번역은 기존의 옷(번역) 아래에 잠재적 의미를 파악하는 발견임과 동시에 이를 자신의 옷(주석)으로 재치장하는 행위”이다(윤민우 117에서 재인용). 두 번째, 의복 메타포의 맥락이다. 텍스트는 직조물(textile)과 연관 지을 수 있는데, 옷(주석)이 몸(original text)을 덮는다는 의미에서다. 요컨대 “옷을 입는 한, 즉 상징계에 갇혀 있는 한, 여성은 남성의 여성 읽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이다. 실제로 그리셀다는 직물 짜는 일은 하지만 단 한번이라도 자신이 의복을 직접 선택해서 입지는 못하고 있고, 이런 의미에서 그리셀다의 옷과 주석은 모두 “등가이며, 모두 남성에 의해 부과”(윤민우 118)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셀다가 혼인을 치른 이후 백성들로부터 나날이 더 많은 사랑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술하며 학사는 미천한 출신의 사람으로부터도 이렇게 큰 가치를 알아볼 수 있었던 영주의 ‘분별력’을 칭송한다(424-27). 과연 그리셀다는 아내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어떤 가사일을 하는 데에도 부족함이 없었으며, 필요시에는 월터를 도와 공익(the commune profit)을 도모하는 데에도 자신의 실력을 어김없이 발휘한다(428-31). 그녀가 손을 쓰기만 하면 백성들 간에 생긴 반목, 대립, 불화 혹은 슬픔은 눈 녹듯 사라졌으며 월터가 자리에 없을 지라도 그리셀다는 계급을 막론한 모든 사람들을 잘 인도해 평온함 속에 거하게 한다. 그녀는 “사람들을 구하고 바르지 못한 것들을 바로잡고자 천국에서 내려온 것처럼 보였으니”(from hevene sent was, as men wende, / Peple to save and every wrong t’amende 440-41), 그만큼 그녀의 “판단력은 대단히 공명정대”(juggementz of so greet equitee 439)했다. 요컨대 기존에 월터의 분별력과 그리셀다의 판단력은 그 어디에도 비견할 만한 것이 아닌 최상의 것이었다. 그런데 월터가 아내로 하여금 비인간적인 시험을 치르게 만들기로 결심한 순간 그의 분별력은 빛을 바래게 된다. 시험은 그의 이율배반적인 면모만 극명하게 드러내게 되면서 후작(marquis)으로서의 그의 자질을 의심케 만든다. 그런데 시험이 시작되며 한 가지 더 깨닫는 사실은 그리셀다의 현명한 판단력, 즉 잘못을 인지하고 시정할 수 있는 그 재능도 그녀가 영주의 부인으로서 행하는 ‘노동의 맥락에서만’ 제대로 발현된다는 사실이다. 그녀의 귀중한 판단력은 월터의 막강한 영향력 하에서는 이른바 마비된다고 볼 수 있는데 그녀는 월터에게 종속된 존재로서 그의 판단에 맹목적으로 복종하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도 득이 될 것이 없는 참으로 낙담스러운 시험인 바이다.
물론 셀 수 없이 여러 번이고 월터는 그리셀다를 시험에 들게 했지만(456), 그가 행하는 시험을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그리셀다는 그녀의 딸과 아들을 각각 살해하는 데 동의(approval)를 보여야하며 최종적으로 자신과 이혼하고 딸과 혼인을 하려는, 즉 근친상간(incest)의 금기를 깨려는 월터의 욕망 또한 책망하는 기색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 월터의 시험을 이렇게 세 가지로 분류한 것이 탐탁지 않은 사람도 있을 줄로 안다. 분명 월터는 자식들을 살해하려는 의도가 추호도 없었으며 그는 그저 그러는 ‘시늉’만 했다. 아울러 그리셀다는 월터의 새 부인이 오래 전 사별한 자신의 딸이라고는 조금도 의심치 못했다. 하지만 여기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사실적인 정황보다는 월터의 가학적 시험이 각각 무엇을 상징하느냐다. 그가 가한 시험의 내막이 어찌되었든 분명한 사실은 그리셀다는 월터의 험상궂은 심복이 자신의 아이들을 살해(slayn 536)하려 자신을 찾아왔다고 생각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동도 하지 않고 순한 양처럼 앉아만 있었다는 점이다(as a lamb she sitteth meke and stille 538).
시험에 들기 전부터 거의 성인(saint)에 가까운 면모를 보여주었던 그리셀다였건만, 그녀는 첫 번째 시험에서부터 월터의 살인욕망을 방기하게 되며 친자살인의 ‘공모자’가 된다. 그녀는 두 차례 자식을 떠나보내면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월터를 원망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따져보면 결혼 서약을 맺는 동시에 그리셀다는 월터에게 모든 권리를 양도했으니 인내심이 발현될 여건은 애초부터 그녀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세상 어디 고분고분 말을 잘 따르는 노예의 '인내심'을 칭찬하는 주인의 이야기가 있던가? 그리셀다의 죄과(罪科)는 그녀가 직접 “소인은 조금도 애통해 할 일이 없습니다, 제 딸과 아들이 설령 죽임을 당한다고 해도 말입니다. 그것이 당신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라면”(Naught greveth me at al, / Though that my doughter and my sone be slayn -/ At youre comandement 647-49)이라고 할 때 여실히 드러난다. 그리셀다의 사상(思想)에 대해 말하자면, 월터의 욕망이 윤리적인 일을 포함한 모든 자신의 주체적 판단을 선행한다. 그러니 이 문맥에서 인내심이란 월터의 욕망이 그녀에게서 이끌어내는 것이지 온전히 그녀의 것이라고 볼 수 없음이다. 인내심이 자랄 수 없는 공간에서 그것과 비슷한 것이 나왔다면 그것은 오히려 체념에 가깝다. 막 혼인을 치른 새 신부마냥 새침 떠는 학사에게 여관 주인 해리 베일리(Harry Bailey)가 채근하듯, “일단 게임에 참여했으면 게임의 규칙을 따라야 하는 법”(For what man that is entred in a pley, / He nedes moot unto the pley assente 10-11)이다. 그리셀다는 그저 월터와 시작한 게임의 룰을 잘 따를 뿐이다.
섹스중독 전문가 로버트 와이즈(Robert Weiss)는 “심리적 근친상간”(psychic incest)으로도 불리는 “은밀한 근친상간”(Covert Incest) 개념을 소개한다. 이는 부(父)와 모(母)중 한쪽―양부모나 장기간 아이와 교류한 보육자도 될 수 있음―이 아이를 은밀하고, 간접적이며 성적인 방식으로 아이를 이용 혹은 학대(abuse)할 때 사용될 수 있는 용어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직접적이고 신체적인 성적 접촉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감정적으로 넌지시 암시되는 방식으로 이뤄지는, 교묘하게 표출되는 성적 욕망(sexual desire)인 셈이다. 이 경우, 아이는 부모 중 한 명의 정서적 충족감을 달성시키기 위해 이용되는데 아이는 자각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와이즈의 말을 빌리자면, “정서적 배우자”(emotional spouse)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예컨대 아이의 발육 상태에 대해서 과도한 관심을 보인다든지, 관음증(voyeurism) 환자처럼 아일 훔쳐보며 지나치게 아이의 사생활에 관여한다든지, 부적절한 방식으로 성적인 대화를 나누려는 부모의 경우 은밀한 근친상간 혐의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할 것이다. 주목해야할 점은 어떤 부부의 경우에 이 상황이 자주 발생하느냐의 문제다. 와이즈는 이 교묘한 근친상간이 육체적, 정서적으로 서로 거리를 두는 배우자 간에 자주 일어난다고 본다. 부부관계에서 찾지 못한 만족감을 자녀가 대신 채워주는 꼴이다. 삐걱거리는 부부관계 탓에 애꿎은 자녀는 “배우자의 대리자”(a surrogate partner)가 되고 아이는 성장하며 명백한 근친상간의 피해자와 별반 다름없는 부정적 결과들을 경험하게 된다(Weiss).
***
다소 과한 측면이 있음. 하지만... 월터가 아내와 거리를 두면서 대신 딸을 그 중심으로 소환하는 것을 보면... 흠
이 개념은 월터의 세 번째 시험에 적용될 수 있기에 그의 근친상간 욕망에 대한 지적이 허무맹랑한 비약이라고만 생각될 수는 없을 것이다. 비록 직접적인 성적 결합은 없었지만 월터는 내내 어린 딸에게 더 교묘하고 은밀한 방식으로 성적 욕망을 표출하고 있었다. 그것은 종래에 그리셀다에게 향하던 것이 임시적으로 전향된 것이다. 그리셀다에게 가한 시험이 진행되는 동안 그는 아내와 자신 간에 생긴 간극을 어떻게 봉합해볼까 궁리하다가 생각이 다다른 곳에서 다른 여성, 즉 자신의 딸을 발견한다. 아내가 자신의 곁을 떠난 사이 딸이 그녀의 대리자격으로 소환되고 딸과의 재혼을 기획하면서 월터는 그리셀다의 부재로 인한 허전함을 달랬던 것이다.
그렇다면 월터의 욕망(lust)이 다른 여성을 향해 분출되는 상황은 자식들을 황천길로 보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셀다가 쉽게 수긍할만한 문제였을까? 종국에 가서 그리셀다가 “당신만이 나의 아내요, 나 다른 아내를 취하지도 않고, 과거에도 결코 취한 적 없소”(Thou art my wyf, ne noon oother I have, / Ne nevere hadde 1063-64)라는 월터의 고백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어찌되었든 그녀가 월터가 원하는 바에 모두 ‘순응’하고 ‘굴복’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리셀다가 섹슈얼리티 노동에 심취해있는 사람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녀에게 월터의 세 번째 과제는 특히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라 짐작된다. 그렇기에 그리셀다가 “한 가지 간청하고, 경고를 드리옵건대 이 유약한 여인에게 고통을 가하지 마시옵소서. 예전에 그리하셨듯이”(O thyng biseke I yow, and warne also, / That ye ne prikke with no tormentyge / This tendre mayden, as ye han doon mo; 1037-39)라는 말을 처음으로 힘주어 내뱉을 수도 있던 것이다. 새 부인은 곱게 자랐기에 자신처럼 가난 속에서 자란 사람과는 달리 역경을 잘 감내하지 못할 거란 말(1040-43)엔 일종의 자부심도 곁들여져 있다. 즉 이 말은 그녀가 그의 변덕(caprice)을 받아주기에 더 적합한 인물이라는 일종의 자기피력을 위한 발언이기도 하다.
월터가 그리셀다에게 자신과 딸의 신혼방을 장식하는 것을 지시함(960-64)에서 한 술 더 떠서 새신부로서의 딸의 미모에 대한 그녀의 의견을 물을 때(1030-31), 그리셀다가 행해왔던 노동의 본질이 어떤 것이었는지 극명하게 드러난다. “내 아내와 그녀의 미모에 대해 자네 어떻게 생각 하는가?”(How liketh thee my wyf and hire beautee? 1301)라는 질문은 새로운 신부를 맞는 데 있어 아무리 “다른 시종들 중에서도 가장 부지런하게”(the mooste servysable of alle 979) 바닥을 쓸고 닦으며 수선을 떨던 그리셀다라도 남편 앞에 설 땐 내놓을 만한(presentable), 곱고 아름다운 외모로써 성적 매력을 보여야 함을 암시한다. 땀으로 범벅된 그리셀다의 모습은 월터의 관심을 수그러들게 할 것이다. 저 질문은 일종의 경고이며 그녀의 역할에 대한 환기로서 기능한다. 반복하건대 그리셀다에겐 선택권이 없다, 그녀의 지참금이란 애초에 월터와 ‘맺은’ “서약”(feith), “헐벗음”(nakednesse) 그리고 “처녀성”(maydenhede) 밖에 없었기에(866).
남편의 재혼에 대한 의사 표명은 그리셀다가 몇 년 동안 변함없이 행했던 섹슈얼리티 노동이 한순간에 부정(否定)됨을 의미하기에 특별히 고통스럽다. 마찬가지로 월터가 그리셀다를 축출할 때 그녀가 최소한 “겉옷”(smok 890)이라도 걸쳐 아이를 품었던 여인의 배, 정확히는 “자궁”(wombe 877)을 가리게 해 달라고 간청한 것은 처음부터 자신이 월터의 후손을 낳을 명목으로 소환되었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월터에게 딸아이와 사내아이를 모두 안겨주었지만 그 결과물이 모두 사라진 이상 그녀의 배는 아이를 품을 수 있음에도 여성의 재생산 역할에서 배제된 불모성(barrenness)을 상징하기에 부끄럽고, 또 가리고 싶은 것이다. 섹슈얼리티 노동을 중점으로 행하는 그리셀다의 입장에서는 특히 더욱 그렇다. 보통 “여성에게 적합한 일은 여성의 몸과 관련한 생물학적 기능-출산과 양육에 관한 것과, 여성다움에서 파생된 친절, 배려, 보살핌 등과 관련된 언설로 구성”되어 있다(문은미 150). 월터는 이런 유의 노동을 하기에 가장 적합한 환경을 만들어주면서도 자꾸 그 환경의 기반을 약화시키게 되면서 그리셀다를 혼란스럽게 하는 방식으로 그녀에게 고통을 준다. 또한 여기서 그리셀다가 처음으로 느끼는 수치심은 그녀의 몸이 오롯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월터라는 남성의 시각, 더 나아가 백성들 모두의 눈으로 낱낱이 관찰되고 해부된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실비아 페데리치(Silvia Federici)는 경제적인 종속이 “섹슈얼리티에 대한 궁극의 통제형태”(57)라고 말한 바 있는데, 실제로 집에서 쫓겨나는 그리셀다에게 헐벗은 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지금껏 그녀의 옷이 벗겨지고 입혀지는 일의 반복도 단순히 남성의 변덕에 따라서 진행되지 않았던가.
윤민우는 아버지에게로 돌아갈 때 보여지는 그리셀다의 맨몸을 발견, 어떤 의복에도 구애받지 않고 한결같이 ‘노동하는 몸’에 상당한 중요도를 부여한다. 그가 보기에 그리셀다의 노동은 “적극적인 자기성취”(120)이며 벌거벗은 몸의 “노동이 주는 자기인식은 타자에 의해 부과된 옷을 무효화하는 데에서 보다 더 적극적으로 자기 자신만의 아이덴티티를 모색”할 수 있게 한다(129). 요컨대 그녀가 노동할 때만큼은 진정한 자신의 주인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과연 이 정도나 되는 의미를 그리셀다의 노동에 부여할 수 있을까? 사실 따져보면 그리셀다는 집으로 돌아갈 때조차 월터가 준 겉옷(의 영향)과 함께하기에 완전히 헐벗은 몸이라고 볼 수 없다. 그리셀다의 맹목적 순종이 빚어낸 치명적인 윤리적 결함에 덧붙여 그녀의 노동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세 가지 이유를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백번 양보해 그리셀다의 노동을 적극적 자기성취로 보더라도 그것의 힘은 굉장히 미약하다. 그녀의 경우 남성에게 순종코자 하는 의지(수동성)가 압도적으로 크기에 노동의 자기실현적 가치는 거의 무(無)에 가깝다고 봐도 무방하다. 둘째, 창의력과 독자적 사고가 결여된 단순한 기계적 노동, 분주함은 어떤 것을 새로이 창출시킬 힘이 부족하다. 그것은 기존에 존재하던 것을 계속해서 반복 재생산할 뿐이다. 또한 그리셀다가 하는 모든 일은 그녀가 월터의 요청에 의해 신혼방을 장식하듯 남성의 취향(plesaunce 964)만을 겨냥한 것이다. 셋째, 그리셀다는 (자신이 배아파 낳은 자식을 비롯) 노동의 결과에서 전적으로 소외되어 있다.
***
윤민우는 분명 노동의 결과에서 소외된 점에 대해서 반박을 했다. 그런데 이 글에선 그 부분을 지면의 제약상 다 다루지 못했다.
1. 가정 내에서 여성이 행하는 노동은 보수 없이 이뤄지는 탓에 흔히 노동이라고 인식되지 조차 않는다. 특히 월터와 그리셀다 간에는 부부관계 이전에 군신관계가 선행한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노사관계”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가정 내 노동자로서의 그리셀다를 강조하고자 했다.
2. 본 논문에서 사용한 텍스트(The Clerk’s Prologue and Tale)는 윌콕슨(Colin Wilcockson)이 편집한 『캔터베리 이야기: 문학 선집』(The Canterbury Tales : a selection) London: Penguin, 2008에 의하며, 우리말 번역은 모두 필자의 것이다. 이하 텍스트 인용은 괄호 안에 행수를 함께 표기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인용문헌
김재환. 『제프리 초서의 문학세계』. 서울: 소화, 2002. Print.
문은미. 「노동자원으로서의 섹슈얼리티 연구―이십대 행사도우미를 중심으로」. 『여/성이론』 3 (2000): 149-70. Print.
윤민우. 「그리셀다의 몸과 노동: 초서의「학자의 이야기」」.『중세르네상스영문학』 16.1 (2008): 113-41. Print.
최지연. 「그리셀다의 대응방식: 언어와 해석」. 『영미연구』 23 (2010): 27-40. Print.
페데리치, 실비아. 『혁명의 영점』. 황성원 옮김. 서울: 갈무리, 2012. Print.
Chaucer, Geoffrey. The Canterbury Tales : a selection. Ed. Colin Wilcockson. London: Penguin, 2008. 311-87. Print.
Weiss, Robert. “Childhood Covert Incest and Adult Life.” Psych Central. Sex & Intimacy in the Digital Age with Robert Weiss, LCSW, CSAT-S, n.d. Web. 05 Jun. 2017
'독서기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베쓰 헨리 - 마음의 범죄 / Beth Henley - Crimes of the Heart (0) | 2021.04.11 |
---|---|
제프리 초서 - 캔터베리 이야기 <그리셀다의 이야기> 분석 PART 2 (0) | 2021.04.11 |
셰익스피어의 비극 <맥베스> 리포트, 잠의 패러독스 (0) | 2021.04.09 |
셰익스피어의 맥베스 / William Shakespeare - Macbeth 02 (0) | 2021.04.05 |
토니 모리슨(Toni Morrison)의『고향』(Home)에 나타난 과거 다시 쓰기 리포트 (0) | 2021.03.2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