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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기록

제프리 초서 - 캔터베리 이야기 <그리셀다의 이야기> 분석 PART 2

by 나의달님 2021. 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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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리 초서(Geoffrey Chaucer, 1340-1400)의「학사의 이야기」(The Clerk’s Prologue and Tale) 분석 Part 2 

 

본 포스팅은 같은 작품에 대한 두 번째 포스팅입니다. 그리셀다의 이야기를 분석한 이전 포스팅 먼저 보기: [클릭

 

그리셀다의 인내심에 대한 칭송이 모두 허상인 이유는 애초에 그런 여인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리셀다는 없다. 그녀는 백성들이 월터의 후계자를 보고자 하는 조급함에 고용된 만인의 여성이자 아내였다. 그녀가 첫 딸을 출산했을 때 영주뿐만 아니라 온 백성들이 덩달아 기뻐했던 이유는 그녀가 “불임”(bareyne 448)이 아님이 증명되었고, 사내아이도 곧잘 출산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이었음을 상기하자(442-48). 그녀의 섹슈얼리티는 계속해서 감시되고 통제되어 왔고, 그녀는 하나의 인격체가 아니라 섹슈얼리티 노동을 행하는 한명의 여성에 불과했다. 그런 존재에게서 인내심과 덕스러움을 운운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리셀다의 순종성은 월터의 괴물성(monstrosity)에 대항하고 그것을 무화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이 아니라 자신도 그 괴물성을 답습해 결국 괴물의 수를 증식시키는 악이다. 그녀는 더 아름답고, 어리고, 월터의 신분에 더 잘 어울리는 다른 여인이 나타나면 다수의 동의하에 언제든지 축출되고 대체될 수 있는 대상, 지독한 품평의 대상에 불과하다(988-94).

그렇다면 월터는 굳이 공을 들이지 않아도 분명히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을 괜한 수고를 해 증명하려 했던 우스운 꼴이 된다. 월터의 시험이 흥미로운 이유는 겉보기에 그리셀다가 한 여성으로서, 아내로서 당할 수 있는 모든 모욕과 수치를 감내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실 월터가 더 많은 것을 잃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그리셀다는 실질적으로 결혼 서약의 ‘구속력’으로부터 점차 자유로워지는 반면 월터는 본인이 시작한 시험에 본인이 예속되는 양상을 보인다. 월터의 시험은 그리셀다의 순종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고 애초에 결혼 서약의 요체 또한 남편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absolute obedience)이었지만, 월터는 아내의 정조를 시험하기 위해 계속해서 다른 이들의 권력을 동원해야만 하는 꼴사나운 상황에 처한다. 이를테면 첫 시험에서 월터는 ‘자신은 괜찮지만’ “귀족들”(gentils 480)이 그리셀다를 탐탁지 않아한다는 이유를 들어 딸을 빼앗고, 그 다음엔 “백성들”(peple 625) 핑계를 들어 아들을 빼앗는다. 마지막으로 재혼 의사를 밝힐 때, 월터는 그 ‘개인’은 그리셀다를 아내로 맞아 행복을 누렸지만 자신의 ‘높은 신분’(greet lordshipe 797)이 자신을 “예속 상태”(servitute 798)에 처하게 함을 고백하고 있다. 이때 그는 교황(pope)의 권력까지 빌어가며 그리셀다를 소위 말하면 ‘설득’한다. 종합해보면 그리셀다는 단 한 번도 오롯이 월터에게만 순종한 적은 없는 것이 된다이 각도에서 보면 그리셀다는 성차별적 사회구조를 완벽히 이해하고 그것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용할 줄 아는 여성이 된다. 이는 즉 괴물처럼 순종하는 그리셀다의 태도가 오히려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의 허점과 모순을 노정하는 새로운 힘으로서 기능할 수 있단 말이다. 월터도 그녀의 적극적인 생존전략 앞에서 백기(白旗)를 든다.    

자신을 소외시키는 세력들이 점차 커짐에도 불구하고 그리셀다가 모든 것을 홀로 감당하는 반면 월터는 자신의 여동생과 백작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모든 일을 진행한다. 그리셀다는 특유의 한결같은 태도로 하여금 온갖 결정 및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움을 느끼지만 월터는 시험의 존재로부터 한시도 자유롭지 못하다. 그는 시험의 정체가 누구에게라도 발각될까 불안해하며, 동시에 그리셀다가 자신의 요구에 불만족스러운 반응을 보일까 끊임없이 초조해한다. 그 과정에서 월터는 자니큘라에게 딸을 평생 데리고 산다는 약속(307-08)은 물론이거니와 백성들에게 자신만큼이나 그리셀다를 공경하고 사랑해주란 당부(369-71)도 자신이 다 먼저 파기하는 모습을 보인다. 덕성을 보고 그리셀다를 아내로 취한 그가 자신의 덕성을 저버리면서까지 그녀를 시험하는 데 혈안이 되어있는 것이다. 어떤 형식으로 둘러싸이든 변함없는 본성을 유지하는 그리셀다에 반해 시시각각 변화하는 월터의 모습은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절대자의 모습에서 동 떨어져 있다. 어떤 상황에서든 평정을 유지하는(unmoved) 그리셀다에 반해 월터는 거짓말을 일삼고, 백성들의 증오를 사고(they hym hatede 731), 표정을 가장하고(feyned 513), 그리셀다를 예의 주시(waiteth 708)하게 되며 시험에 구속되는 양상을 보인다. “겉으로는 ‘주인’이고 강자이면서도 늘 초조한 월터에 대하여, 모든 것을 내어주고 순종해야하는 약자이며 ‘노예’인 그리젤다가 오히려 의연할 수 있는”(윤민우 137) 상황인 바, 이 시험은 결국 누구에게도 득이 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재차 확인할 수 있다.     
     
종국에 가서 그리셀다가 후작의 부인으로 복위됨과 동시에 초서는 이 악질적인 노동 및 시험을 즉각 중단시킨다. 이야기의 결미에서는 남녀노소를 막론한 모든 사람이 흥겨운 축제를 즐기는데 “기쁨과 오락”(murthe and revel 1123)이 만연한 이 하루에는 월터의 시험 충동이나 그리셀다의 맹목적인 노동, 달이 차고 기울듯(998) 변덕을 부리는 대중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혼절을 했다가 다시금 의식을 찾았을 때, (남편의 시험에 대해 깨달은) 그리셀다는 분명 그 전과는 다른 여성이다(1079-80). 그리셀다는 월터의 “사랑하는 아내”(dere wyf 1056)로서 그녀의 모습 그대로 인정받게 되고 이 부부는 여생 동안 “화합과 평화”(in concord and in reste 1129)를 누린다. 월터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그리셀다에게 가했던 시험과 같은 존재는 두 번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는 일이 없었다.

학사는 이야기를 구술하는 내내 월터의 경솔한 태도(frivolous attitude)에 거듭 반감을 표명한 바 있다. 즉 그의 월터와의 거리두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학사는 “내가 보기에 불필요하게 부인을 시험하여 고통과 두려움에 처하게 하는 것은 도리가 아닙니다”(But as for me, I seye that yvele it sit / To assaye a wyf whan that it is no nede, / And putten hire in angwyssh and in drede 460-62)라며 월터의 시험을 ‘불필요한 것’으로 치부하고 있는데, 이야기를 마친 후 그는 한 여성이 인간 남성에게 그토록 대단한 인내심을 발휘할 수 있다면 신이 우리에게 주시는 시련 또한 능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 설교하며 이야기를 인간과 신에 대한 알레고리로서 읽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1149-55). 하지만 전반적으로 따져볼 때 학사는 이야기의 개연성을 부정하는 경향이 뚜렷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즉 그리셀다 사건은 있을 수도, 일어나서도 안 되는 일이다. 요즘 시대에 그리셀다와 같은 인물은 주변에서 한 두 어명 찾아보기도 힘들기에 혹 월터와 같이 여성을 시험하려 할 경우 휘어지기 보다는 똑 부러진 (황동이 섞여 질이 낮은) 금화만이 손에 남게 될 것임을 예견하며(1163-69) 학사는 이만 발언권을 초서에게 넘긴다. 결국 월터의 시험은 비합리적이고 불필요한 것이며, 이에 대응하는 그리셀다의 맹목적인 복종(suffraunce 1162)도 기형적이며 ‘허구적’이다.  

 

초서의 맺음말 또한 이와 궤를 같이한다고 볼 수 있을 터이다. 그는 일관성 있게 아내를 시험하려는 남성과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남편에 맹목적으로 순종하는 여성에 부정적인 시각을 내비치고 있다. 사실 이 맺음말을 액면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의 문제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만일 초서가 너무도 노골적이고 논란적인 얘기를 하고난 뒤 반발이 극심할 것을 예상하며 여성을 두둔하는 방식으로 반발을 무마해보고자 했던 것이라면 이 맺음말은 껍데기는 그럴듯하지만 실질적 알맹이는 없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직접적인 답을 주고 있지 않기에 독자로서는 단지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김재환도『제프리 초서의 문학세계』에서 초서의 결구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고 있는데, 그가 보기에 “누구의 말이든 마음씨 좋게 수긍해 주고, 언제나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그 순례단의 사건들을 고지식하게 기록만 하는”(301) 순례자 초서의 성격을 감안한다면 그가 갑자기 발끈하여 나서서 결구를 붙였다는 것은 아귀가 맞지 않는다. 순례자 초서가 끼어들어 강력한 주장을 펼친 뒤 어떤 해명도 없이 퇴장한다는 것은 다소 작위적이라는 말이다. 즉 김재환은 학사가 아닌 다른 이가 “1,170~76행들과 뒤이은「결구」를 개진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301)는 의견을 피력한다.

 

그렇다면 학사가 둘로 갈라지는 금화를 예견한 것과 동일한 맥락에서 초서(혹은 학사)가 말하는 “치체바체”(Chichevache 1188)도 빼빼마른 채로 계속하여 울부짖을 것이다. 월터의 시험은 극도로 비합리적이다. 그리고 이런 성격의 시험으로 인해 작위적으로 이끌어내어진 그리셀다의 인내심은 결국에는 허구이기에 치체바체는 그리셀다는 탐스러운 먹잇감으로조차 여기지 않고 지나쳤을 것이다.  
    
3. 치체바체: 인내심이 많은 여성을 잡아먹는 전설의 소. (French) ‘thin cow’, which proverbially feeds on patient wives, and (because there are so few such women) remains thin. The Clerk’s Prologue and Tale, 주석 7 참조. 
    
인용문헌
    
김재환. 『제프리 초서의 문학세계』. 서울: 소화, 2002. Print.
문은미. 「노동자원으로서의 섹슈얼리티 연구―이십대 행사도우미를 중심으로」. 『여/성이론』 3 (2000): 149-70. Print.
윤민우. 「그리셀다의 몸과 노동: 초서의「학자의 이야기」」. 『중세르네상스영문학』 16.1 (2008): 113-41. Print.
최지연. 「그리셀다의 대응방식: 언어와 해석」. 『영미연구』  23 (2010): 27-40. Print.
페데리치, 실비아. 『혁명의 영점』. 황성원 옮김. 서울: 갈무리, 2012. Print.
Chaucer, Geoffrey. The Canterbury Tales : a selection. Ed. Colin Wilcockson. London: Penguin, 2008. 311-87. Print.
Weiss, Robert. “Childhood Covert Incest and Adult Life.” Psych Central. Sex & Intimacy in the Digital Age with Robert Weiss, LCSW, CSAT-S, n.d. Web. 05 Jun.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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